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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성 Jan 17. 2016

<레버넌트>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한계 상황 속에서 나는 과연 인간인가? 


만약에 당신이 액션 영화나, 히어로물 영화 등등을 좋아한다면 이 영화는 재미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영화이다.


아들이 죽은 순간 그는 이미 죽었다.


샤르트르의 <벽>을 보면 사형 선고를 당하기 직전의 세 사람이 나온다. 세 사람들은 감옥에 갇혀 있어도 추위를 느끼며 취위를 이겨내기 위해서 운동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이 죽는다는 사형선고를 받고나서 그들은 추위를 느끼지도 못하고, 자신이 오줌을 지리고 있다는 것을 알지도 못한다. 이처럼, 사형선고를 받는다는 것은 육체적으로는 살아있지만 정신적으로는 이미 죽은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다. 디카프리오가 연기한 휴 글래스는 곰과 맞짱을 뜨다가 많은 상처를 입어 생사의 기로에 서있었다. 그의 동료들은 산을 타다 더 이상 휴 글래스를 옮기지 못하고 그의 임종을 지켜줄 사람들을 선발하고 나머지는 떠나게 된다. 여기서 남은 것이 바로 톰 하디가 연기한 존 피츠제럴드였는데, 그는 휴 글래스를 죽이려다 휴 글래스와 인디언 여자 사이에서 낳은 글래스의 아들가 막아서 글래스를 죽이지 못한다. 하지만 휴 글래스 앞에서 그의 아들을 죽여버린다. 이때, 휴 글래스는 사형선고를 받은 것과 같은 것이다. 몸과 정신적으로 무너져 내린 휴 글래스에게는 겨울의 평원이 그의 한계 상황인 것이다. 이 한계 상황에서 휴 글래스는 살아있는 좀비이며, 단지 도망친 피츠제럴드를 바라보며 따라가는 좀비일 뿐이다. 


극한 상황 속에서 난 누구인가? (나사로의 부활)


휴 그래스는 다친 몸을 이끌고 피츠제럴드를 잡아야 한다는 신념 하나로 기나긴 겨울의 여정을 떠난다. 그는 밥이 어둑해질 때, 평원에서 생고기를 먹는 한 인디언을 만나게 된다. 여기서 휴 그래스와 인디언이 서로 고기를 먹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것은 마치 거울의 이미지와 같다. 휴 그레스도 가족을 잃었고, 그 인디언도 가족을 읽었다. 인디언이 한 이야기가 이 영화의 맥을 하나로 관통하는데, 정확히는 기억나지않지만, '나는 가족을 읽었다. 하지만, 복수는 하늘이 하는 것이다.'라고 말이다. 이 인디언과 휴 그래스는 일종의 동일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인디언은 휴 그래스에게 깨달음을 주는 인물이며, 정신적으로, 신체적으로 거의 좀비 상태인 휴 그래스에게 깨달음을 주는 인물이다. 휴 그래스가 겨울의 추위 속에서 몸이 병에 걸리자 인디언은 그를 위해 무덤과 같은 집을 지어준다. 휴 그래스는 잠이 들고 아침에 일어난다. 근데, 무덤같은 겨울막이를 부시고 나올 때, 휴 그래스의 모습은 마치 성경에 나온 나사로의 부활과도 같은 모습이다. 그는 신체적으로 그리고 정신적으로 다시 치료가 되었다. 밖으로 나오자, 휴 그래스는 인디언이 사라진 것을 알고 그를 찾아 나서지만 인디언은 프랑스인들에게 짐승이라는 푯말이 걸리며 죽어 있었다. 여기서 인디언이 죽은 이유는 휴 그래스가 다시 부활하게 되고 비록 인디언은 죽었지만, 인디언의 인간성은 다시 휴 그래스에게 들어가게 된 것이다.


동물과 인간 사이,,,


<레버넌트>에서 우리는 서양의 폭력적인 모습을 볼 수 있다. 서양인들은 자신들의 합리성과 이성을 통해 이분법을 완성시켰다. 자신들의 발전 경로를 따르지 않으면 미개하고 짐승과 같은 것이다. 서양인들의 관점에서 합리성과 이성을 추구하지 않는 인디언들은 짐승이며 그들은 침략해야 하며, 교화시켜야 하는 대상으로 바라본다. 하지만, 영화 속에서 인디언이 오히려 인간적이며 그들을 먼저 공격하지 않으면, 그들은 공격하지 않는다. 하지만, 서양인들은 자신들의 이익과 참욕을 추구하며 동물과 같은 모습을 보인다. 옛날 윤리책에서 인간이란 존재는 열려있는 존재라고 정의내린 적이 있다. 우리 인간은 정말 많은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들 돌려 말하면 인간이란 존재는 매우 나쁘게 변할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에게 더 높은 도덕적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다. 휴 그래스가 처음에 살려고 했던 것은 아들에 대한 복수였다. 하지만 그가 고난을 겪으며 깨달은 것은 바로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이었을 것이다. 그가 내린 결론은 바로 인간이란 휴머니즘적인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가 나중에 프랑스 군과 대치할 때, 강간 당하던 인디언을 살려줬던 것으로 알 수 있다. 



나의 마지막 인간성을 위해서 나는 너를 죽이지 않는다.


극적으로 병영 캠프에 돌아온 휴 그래스는 다시 피츠제럴드를 쫓아간다. 피츠제럴드는 그의 상관을 죽이고 계속 도망친다. 최후에 휴 그레스와 존 피츠제럴드는 만나게 된다. 마지막 장면에서 존 피츠제럴드는 '나에게 복수한다고 해서 죽은 아들이 돌아오는 것은 아니야'라고 말한다. 그렇다. 그의 말대로 복수를 해봤자 그의 죽은 아들은 돌아오지 않는다. 하지만, 휴 그레스는 복수심 때문이 아니라, 인간이라면 최소한으로 지켜야할 그 마지막을 행하기 위해서 온 것이다. 바로 아버지가 아들에 대한 행동이다. 피츠제럴드와 그레스는 육탄전을 버리며, 피츠제럴드를 죽음으로 몰지만 휴 그레스는 그를 죽이지 않고 자연으로 표현되는 인디언에게 피츠제럴드의 죽음을 맡긴다. 휴 그레스가 만약 여기서 피츠제럴드를 죽였다면, 피츠제럴드나 휴 그레스나 같이 타락한 형태로 남을 것이다. 하지만, 휴그레스는 자신의 인간성을 지켜냈으며, 아버지의 역할을 끝까지 다하게 된다.  영화를 보면서 느낀 것은 인간과 동물이라는 것은 인간성과 도덕성이라는 것으로 차이가 난다. 나의 감정과 탐욕으로 세상을 산다는 것은 동물과도 같은 것이다. 하지만 나의 욕구와 감정을 절제하며, 인간답게 산다는 것 자체가 인간이 위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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