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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성 Jun 29. 2017

순수한 소녀와 돼지의 눈에 비친 세상

<옥자> 리뷰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옥자>의 개봉을 놓고 많은 논의가 있었는데, 그것은 제외하고 <옥자>는 이번 해에 나온 영화 중 단연 최고라는 생각을 한다. 


옥자의 내용은 간단히 이야기하면 전세계에 식량난이 일어나게 되고 미국의 미란도 기업에서는 유전자 조작 돼지를 발명한다. 26마리 정도의 괴물 돼지들을 각국의 농부들에게 10년동안 키우게 하고 10년이 지나면 괴물 돼지를 미국으로 소환하여 식량으로 사용하는 계획이다미란도 기업에서 돼지를 10년동안 키우게 한 것은 자신들의 자본가적 이미지를 친환경적인 기업으로 둔갑하기 위한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미자는 자신의 돼지에게 옥자라는 이름을 붙이고 옥자와 뜨거운 우정을 나눈다. 하지만 10년이 지나고 미국 기업은 옥자를 뉴욕으로 대려가려고 한다. 이에 대해 미자는 자신의 친구 옥자가 도축장의 고기가 되는 것에 분노하고 옥자를 다시 집으로 대려오려고 한다.


미국의 자본주의 그리고 육류 산업


<옥자>는 GMO를 통해 인공적으로 거대한 돼지를 만들어 낸다. 그리고, 그 돼지를 식량으로 사용하려고 한다. 사실, 미국의 육류 사업을 디스하는 것 같지만 미국의 식량 정책과 농업산업에 대한 이해가 필요할 것 같다. 미국의 식량 정책에 대해 알고 싶다면 <King corn>이라는 다큐맨터리 영화를 보기를 추천한다. 잠시 <King cron>이야기를 해보자. <King corn>은 영화를 제작한 제작자들이 머리카락에서 탄소가 다량으로 검출된 것에 대해 의문을 표한다. 원래 우리 몸에는 탄소의 함유량이 18% 정도인데 상대적으로 탄소의 함유량이 많게 나왔기 때문이다. 이렇게 탄소의 양이 많았던 것은 우리가 마시는 쥬스, 고기, 과자에도 고과당의 옥수수 시럽이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옥수수 특히 GMO 옥수수가 판을 치게 된 것은 엘 버츠의 농업 정책 때문이었다. 엘 버츠는 옥수수 농장을 거대한 자본의 논리에 따라 구제를 푼 사람이다. 그는 '풍족한 식량의 세상, 거대한 농업생산량'이라는 슬로건을 걸고 옥수수를 무지막지하게 생산해낸다. 옥수수 생산량의 32퍼센트 정도는 옥수수를 에탄올로 발효시키고 나머지는 식품으로 사용된다. 미국 농장에서 소나 돼지 공장들은 옥수수 밭을 함께 운영하는데, 여기서 소나 돼지가 먹는 것이 산업용 에탄올로 발효시키고 남은 부산물을 사료로 주는 것이다. 이런 인공 사료를 먹는 소나 돼지의 수명은 짧다. 특히, 소의 경우 우리에 가두어 움직이지 않게 만들어 살을 찌게 만들고 옥수수만 먹이면 120일 만에 위궤양이 생겨 죽음을 맞이한다. 풀과 건초를 먹이지 않고 옥수수의 녹말만 먹이다 보면 산이 과다분비 되기 때문이다. 즉, 경제적 이익을 위해 소나 돼지를 학대하는 행위인 것이다. 우리가 소비하는 돼지나 소고기는 고기가 아니라 고기를 가장한 지방이다. 하지만 미국은 왜 이런 생산체계를 원할까? 미국은 값싼 음식을 원하다. 그 이유는 사람들이 싼 음식을 원하기 때문이다. 옥수수는 또한 감미료 산업으로 넘어가 우리가 마시는 콜라와 사이다 같은 곳에 모두 들어간다. 싼 음식을 원한 인간의 대가는 바로 우리의 건강을 잃었다는 것이다. 영화 <옥자>에서도 구체적으로 이런 내용을 다루지는 않지만 인간의 탐욕이 동물들을 학대하고 자연을 파괴하는지를 보여준다.



미국, 아니 신자본주의는 가상세계를 꿈꾸며 조작한다.


<옥자>에서 눈여겨 볼만한 장치는 바로 옥자와 미자가 뛰노는 자연 그리고 뉴욕과 서울이라는 도시의 대비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에서 장소는 중요한 장치다. 미자와 옥자가 사는 산골 마을은 깨끗하고 투명하며 순수의 세계라고 한다면 뉴욕과 서울은 화려하고 편리하지만 그 이면에는 자본주의의 어두운 면을 보여주는 공간이다. 미란도 기업은 전 CEO이자 루시 미란도의 언니가 환경 오염물질을 호수에 방류해 호수가 터져버리는 사고를 낸다. 그 이후 미란도 기업의 이미지는 바닥으로 추락한다. 이를 쇄신하기 위해 루시 미란도는 자신의 기업이 친환경적이고, 깨끗한 기업이라는 이미지는 슈퍼 돼지 프로젝트를 통해 10년 동안 준비한 것이다. 미자가 미란도 기업의 도축장에 들어가 옥자를 찾으러 갈 때, 미자의 눈에 비친 미란도 기업의 실체, 신자유주의의 민낯이자, 세상은 공포스러운 공간이다. 봉준호 감독이 14살 시골 소녀를 주인공으로 배치한 것은 순수한 소녀의 눈에 비친 세상은 마치 도축장과 같이 척박하고 살벌한 곳이었다. 신자유주의에서 기업은 제품을 파는 것이 아니다. 바로 '기호'를 판다. 바꿔 말하면 우리는 기업의 이미지를 보고 물건을 사는 것이다. 나는 전문가는 아니지만 지금 소비자들은 핸드폰의 전화 기능 때문에 제품을 구매하지 않는다. 만약에 전화 기능 때문에 소비를 한다면 우리가 값비싼 돈을 주고 삼성이나 애플의 핸드폰을 살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애플이라는 회사의 이미지를 보고, 삼성이라는 회사의 이미지를 보고 제품을 구매하는 사회다. 사실, 기호에 대한 소비는 비판의 대상은 아니다. 제품을 자기 돈 주고 사겠다는데 그것이 문제이겠는가? 문제는 이런 이미지들이 사람들에게 본질을 보여주지 않고 조작을 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장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에서는 디즈니랜드를 비판하며 미국 자본주의를 비판한다. 디즈니랜드에 가면 동화스럽고 사랑이 넘치며 귀엽고 누구나 아이가 되는 꿈을 꾼다. 또한 디즈니는 교육적이고 언제나 사회적으로 봉사를 하며 시민들을 생각하는 기업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한다. 하지만, 디즈니 또한 사기업이며 동화적인 모습만을 보이는 것은 아니다. 최근에는 많이 나아졌지만 디즈니 세상 속에서는 미국 중산층 보수 백인의 모습도 숨기기도 했으며, 여성에 대한 편견을 심어주기도 했으며 만화가들이 시위할 때 무력으로 진압하는 등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을 디즈니가 행했다. 그렇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디즈니의 이미지는 사회의 본질적 문제, 우리가 직시해야할 문제를 은폐해 버린다. 이것은 디즈니 뿐만 아니라 미국, 그리고 자본주의 경제를 받아들인 많은 국가들 속에서 이루어지는 일들이다. 미란도 기업 또한 자신들의 탐욕을 사람들이 보지 못하게 하고 감시받지 않기 위해 슈퍼 돼지 프로젝트로 이미지를 쇄신한다. 이렇게 보면 지금 우리가 바라보는 세상이 과연 현실인지 가상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 우리가 보는 미란도 기업은 친환경 기업이지만 이는 허깨비다. 그런데 최근의 자본주의는 우리의 의식으로 조작한다. 미란도 기업의 예는 미국이니까 너무 멀까? 그러면 지금 인터넷을 키고 페이스북을 보면 '우리가 꼭 가봐야 하는 맛집'이라는 것이 정말로 네티즌들이 만든 것일수도 있지만 기업에서 만든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봤으면 좋겠다. 



순수한 돼지와 소녀의 눈에 비친 사회


앞에서 미국의 자본주의 체제와 조작에 대해서 이야기했지만 정말로 봉준호 감독이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옥자와 미자의 우정이 아니었을까? 옥자와 미자가 바라본 세상은 어땠을까? 서울 거리를 돌아다니면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이지만 그래도 평화로워 보인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음지에서 착취가 있고 더러움이 있고, 악이 존재한다. 순수한 옥자와 미자의 눈에 비친 세상은 공포로 가득찬 세상이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최대 이익을 위해 상대를 존재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수단으로 대하고, 모든 것을 돈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그런 생각이 순수한 미자와 옥자의 목을 조른다. 봉준호 감독이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순수한 존재가 이 사회 속에서 겪는 투쟁의 과정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 하지만, 이 순수한 두 존재가 겪은 사건과 결말은 그리 밝지는 않다. 마지막 장면에서 옥자가 도살 당하기 직전 미자는 미란도 기업의 전 CEO와 딜을 한다. 한국에서 가져온 금으로 된 돼지와 옥자를 교환한다는 것이다. 즉, 미자가 옥자를 구매하고 싶다는 것이다. 교환은 성사되고 미자는 옥자를 대리고 미란도 기업의 도축장을 나오는 장면은 관객들을 슬프게 만든다. 수많은 슈퍼 돼지들이 도축의 시간을 기다리며 미자와 옥자를 슬픈 눈으로 바라본다. 그 중 돼지 가족중 한 엄마 돼지가 자신의 새끼 돼지를 탈출시켜 옥자가 그 돼지를 대리고 미자와 산골로 돌아간다. 어떻게 보면 옥자는 살아남아 해피앤딩처럼 보이지만 도축장을 앞에 둔 돼지들을 바라보면 자본주의의 근본 정신을 잃어 버린 인간의 탐욕이 얼마나 잔인하고 악한지를 보여줌으로 영화는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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