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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성 Oct 02. 2017

도시를 걸으며 인문학을 생각하다

공간으로 세상 읽기 (집, 터, 길의 인문사회과학) <전상인>

장소에 관련된 이와 같은 관점은 두 가지 측면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첫째는 장소가 모든 곳에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침대, 방, 집, 동네, 마을, 학교, 카페, 공원, 길, 도시, 나라, 지구 그 어디든 가리지 않고 적용될 수 있는 것이 바로 장소 개념이다. 모든 공간은 인간의 경험에 의해 장소가 될 수 있는 잠재력을 갖고 있다. (중략) 둘째는 장소가 반드시 위치 고정적일 필요가 없다는 사실이다. (공간으로 세상 읽기, 세창출판사, P. 35)


우리나라는 압축적 근대화 과정에서 공간 문제에 대한 인문사회학 분야의 지분을 알게 모르게 배제해 왔다. 공간을 사유나 성찰이 아니라 계획과 개발의 대상으로 여기는 시대정신이 공간연구를 천축공학이나 토목공학, 도시공학이나 도시계획학, 주거과학 등에 거의 일임하다시피 한 것이다 (공간으로 세상 읽기, 세창출판사, P. 27)


홍대 거리하면 생각나는 것은 개성이 뚜렷한 카페와 상점들이 있다는 것이다. 홍대 거리는 예술가의 거리이며 창작의 거리였다. 하지만 인터넷이나 페이스북을 보다보면 다양한 개성있는 카페들이 점점 사라지고 획일적인 프렌차이즈 공간이 들어서게 된다. 자신이 좋아하던 특색있는 카페가 사라진다는 것은 많은 사람의 아쉬움을 느끼게 한다. 그것은 무엇 때문일까? 아마, 그 카페에서 책을 읽고, 친구와 추억을 만들었던 우리의 기억이 소멸되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어린왕자>에서도 여우가 익어가는 갈대 밭을 바라보며 왕자를 기억할 것이라는 말을 생각하더라도 인간과 장소는 매우 중요한 연관 관계를 맺는다. 바로 기억의 매개이다. 당연히, 장소라는 개념은 인문사회적으로 고민해 보아야할 때이다. 특히, 대한민국은 서양의 근대화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였고 모든 가치를 효율성 중심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당연히, 효율성과 편리성은 우리에게 필요한 요건이긴 하지만 이 가치가 장소를 설명하는 전체적 요소는 아니라는 것이다. <공간으로 세상 읽기>는 이런 대한민국의 효율성 중심주의 사회에 대한 인문학적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다양각색이던 인류의 주택유형이 언제부던가 상대적으로 유사해지면서 범세계적으로 평준화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주거공간의 근대화인데, 시기적으로 보면 산업화 이후의 현상이었다. (공간으로 세상 읽기, 세창출판사, P. 47)


산업혁명 이후 주택의 의미와 위상은 완전히 달라졌다. 농민들은 임노동자가 되어 도시로 대거 몰려들었고, 도시 안에서 직장과 주거는 공간적으로 분리되었다.주택 소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시대에 주택을 자급자족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주택의 심각한 사회문제로 등장한 것은 인류 역사상 이때가 처음이었고, 주거문제 해결을 위한 별도의 정책적 접근이 필요해진 것도 이 무렵이 최초였다. (공간으로 세상 읽기, 세창출판사, P. 53)


우리는 누군가를 알고 싶을 때 상대방의 방이나 집을 찾아간다. 꽂혀있는 책을 보며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게 되고 장식품을 보며 어떤 취미를 즐기는지 유추할 수 있다. 이처럼, 집이라는 것은 한 개인의 정체성을 생각하는 계기를 제공한다. 집은 한 개인의 정체성 뿐만 아니라 지역과 역사에 대해서도 유추할 수 있다. 집은 무리적 요소 (기후, 지리, 지형, 재료)에 따라, 경제와 정치(경제체제) 그리고 사회문화에 따라 그 형태가 다양했다. 집은 내부적으로 개인의 공간을 의식한 동시에 당대의 사회의 모습을 보여주는 거울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집은 근대화 이후 획일화의 길을 걷게 된다.


근대화가 일어나던 시기, 브르주아 시민 계급은 아파트에 살기를 원했다. 특히, 18세기에는 가족의식이 증가하여 사회보다는 개인의 사생활을 중시하는 풍조가 나타났다. 개인주의와 가족주의는 사회를 밀어내기 시작한 것이다. 이와 동시에 도시가 등장한다. 주택의 수요가 증가하자 한 공간에 많은 사람을 넣는 것을 효율적으로 생각한 브르주아는 아파트를 건설하기에 이른다. 즉, 한 공간을 수직적으로 만들어 효율적으로 사람들을 관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에 앞장을 섰던 사람은 바로 르코르뷔지에였다. 그는 과학기술을 근간으로 하여 합리성과 효율성에 따라 아파트를 건설한다. 르코르뷔지에는 아파트를 통해 안전, 편리성, 효율성 그리고 사생활 보호라는 긍정적 효과를 이끌어 냈지만 그에 대한 반대급부도 있었다. 바로 효율성에 따른 아파트는 공간의 체험과 상상력을 말살하게 되었다.


이에 대해, 하이데거와 뷰슐라는 분노를 했다.하이데거의 철학에서 공간은 체험의 공간이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마치 반 고흐의 그림을 보고 시간과 공간을 잊은 채, 신을 만나는 체험을 하는 공간을 하이데거는 중시했다. 또한 과학주의에 심취했다 과학주의가 모든 것을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던 가스통 바슐라르는 공간이 오히려 내면의 상상력을 일깨워 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아파트를 건설할 때, 효율성과 합리성이 나쁜 것은 아니다. 다만, 집을 지을 때, 오로지 효율성과 합리성만이 절대적 가치로 생각하고 집을 짓는 것은 문제가 되는 것이다.




보다 중요한 점은 도시 속 동네가 갖고 있는 힘의 원론 기억과 역사에 있고 그것은 쉽게 변하지 않는 근린의 사회 및 공간적 네트워크에 기반하고 있다는 원론과 원칙을 명심하는 일이다. (공간으로 세상 읽기, 세창출판사, P. 106)


공공계획이 사회 갈등의 진앙지인 도시를 대상으로 출발하였고, 그런 만큼 처음부터 도시계획이 물리적 공간 개조를 넘어 정치 및 사회적 목적을 지향했다는 사실이다. (공간으로 세상 읽기, 세창출판사, P. 135)


인간은 공간을 공유하며 살아가는 존재다. 마을의 탄생은 우물을 중심으로 하였다. 마을은 단체 생활의 공간이었고 개개인을 마을의 일원으로 묶어 주었다. 그러나 도시화, 산업화, 세계화가 도시를 '거대' 도시로 만들었다. 도시가 나타났다고 마을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다만, 과거의 중심을 차지하던 마을은 도시의 하위 요소로 편입이 되었다. 최근 도시에는 어반빌리지라는 개념이 존재한다. 어반빌리지는 공공의 기억을 공유하는 곳이다. 어반빌리지는 생활공동체의 인프라를 통해 기억을 응집시키며 골목길에서 유희와 문화의 공간으로 공동의 기억을 공유한다. 즉, 어반빌리지의 필수 조건은 동네에 문화자본이 쌓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전통적이던 아니던 간에 많은 사람의 추억이 쌓여야 한다. 가령, 압구정동에 맥도날드 1호점은 만남의 광장이었다. 하지만, 젠트리피케이션으로 압구정 맥도날드 1호점이 폐업을 할 때 수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며 주문하는 모습은 어반빌리지의 모습을 압구정동이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제 압구정동은 상업화 되어 주민들의 공동의 기억을 상실해 버린 동네과 되었다.


마을을 위 개념으로 편입시킨 도시는 어떻게 나타났는가?  도시는 농업혁명과 함께 등장했으며 산업화 시기에 대세를 이루게 된다. 도시의 발전을 이룩한 사람들은 농업시대에 상류계급이였으며 산업화 시기에는 자본가 계급이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도시라는 것이 정치적 성격을 띈다는 것이다. 도시는 사람들 간의 지배 계급과 피지배 계급의 관계인 동시에 도시와 시골 간의 관계도 정치적 성향을 보였다. 시골은 도시에게 상품을 제공한다. 도시는 정치, 경제, 군사, 문화, 기술의 중심이다. 이런 도시는 시골을 자신의 시녀로 만들었다. 유럽의 도시는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그리고 문화창조 능력에 따라 그 힘을 가진다. 16세기의 자치도시는 제일 강한 존재였다. 그러나 근대국가가 등장하고 자치 도시는 근대 국가로 편입된다. 국가는 자치 도시의 적자로 자본주의와 관료제(국가 개입주의)를 표방했다. 근대 국가는 수도의 개념이 생겨 거대한 대장 도시가 등장한다. 수도는 다른 도시들과 시골을 효율적으로 지배한다.


도시계획의 역사는 도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탄생했지만 궁극적으로 지배의 효율을 위해 나타났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제레미 벤담인데 그가 파놉티콘을 건설할 때 제 일 가치로 둔 것은 바로 효율성이었다. 벤담 시기에 감옥의 수감자는 늘어가고 그들을 관리하는 간수들의 수가 계속 늘어나 재정적으로 문제가 되었다. 벤담은 파놉티콘을 건설하며 한 명의 간수로 수많은 수감자들을 효율적으로 감시하게 만드는 공간을 창조하고자 하였다. 이를 현실화 한 것이 바로 오스망이었다. 오스망은 파리의 도시 계획을 하며 단수화시키고 가독성을 증가시켰다. 즉, 지배자는 정렬된 도시를 한 눈에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미쉘 푸코는 이에 대해 비판을 하였고 <감시와 처벌>에서 벤담의 파놉티콘을 인용해 현대판 빅브라더를 비판한다. 이런 효율성 극대화의 도시계획에서 우리가 지양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도시 계획에서 중요한 것은 의미 있는 공간을 위해 인문사회적 고찰이 필요한 것이다. 도시는 오감을 통해 느끼게 만들어야 하고 추억을 만들 수 있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 또한 사회 자본을 통해 시민 간의 신뢰와 네트워크 그리고 시민참여를 하는 능동적 시민을 육성할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 지금 서울의 모습을 볼 때, 인문 사회적 고찰은 필수적인 것이다.




도로는 도시의 성장과 상응했고 국가의 발전과 비례하는 경향을 보인다. (공간으로 세상 읽기, 세창출판사, P. 164)


공간의 시작은 길이다. 길은 사유의 공간이다. 길은 자연적으로 만들어 졌고 걸으며 많은 것을 보고 생각할 수 있게 만드는 공간이다. 그에 비해 도로는 계획과 인공적인 공간이다. 도로는 길과 달리 자연의 정복자 역할을 하였다. 이런 도로가 국가 발전과 궤를 같이 하는 것은 당연한 생각이다. 도로는 도시와 함께 등장했는데, 이는 도시의 분업화 때문이다. 우리는 집과 직장이 떨어져 있다. 그렇기 때문에 도로가 없다면 이런 분업화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길은 도시와 같이 정치적 모습이 보인다. 과거 유럽에서 성은 도시의 확장성을 막는 요소였다. 하지만 성체는 권력을 투쟁으로 막는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현대 국가에서는 법의 기초하기 때문에 지배자들은 도로를 선택했다. 도로는 오히려 국민을 관리했으며, 자본주의 하에서 자본의 축적을 가능케했다.


먼저, 철도가 등장했는데, 철도는 인간을 사회적 시간으로 편입시켰다. 많은 사람들이 철도의 시간에 자신의 시간을 귀속시킨다. 사회적 시간에서 중시되는 것은 바로 속도다. 속도는 그동안 의미있던 시간을 의미 없는 시간으로 만들어 버린다. 우리는 철도를 타는 시간을 죽은 시간으로 만들어 버린다. 감각적인 것은 없으며 경관을 볼 수도 없다. 오로지 앞으로 달려갈 뿐이다. 또한 철도는 현대인의 시각을 비유적으로 보여준다. 빠르게 달리는 철도에서 우리가 밖으보면 외부는 하나의 물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스팩트럼처럼 일그러져 보인다. 우리가 스마트폰을 보면서 길거리를 걸을 때, 현대인들은 스마트폰에 집중하며 사람들을 피해다니는 그 시각과 철도가 보여주는 시각은 같은 것이다.  또한 철도를 통해 우리는 모든 지역이 획일화되는 과정을 본다. 우리나라에서 고속열차를 타고가면 대전역이나 서울역이나 편의점은 존재하고, 비슷한 먹거리가 존재한다. 하지만 철도는 곧 열세를 맞게 되고 이를 대체하는 것이 바로 지하철이다.

 지하철 또한 인간을 수동적으로 만든다. 인간은 지하철의 시간에 따라 자신의 시간을 맞춘다. 이것은 기술과 인간의 역전 현상을 보여준다. 인간은 자신의 편리를 위해 기술을 만들었고 통제했지만 현대는 기술이 인간을 지배한다. 스마트폰이 나타나기 이전에 인간은 스마트폰 없이 잘 살았다. 그러나 스마트폰이 나타나고 인간의 생활양식이 바뀌게 된다. 맛집을 찾아 다니고 걸어다니며 이메일을 보낸다. 이것은 기술이 인간의 생활양식 전반을 변화시킨다는 것이다. 이는 지하철도 마찬가지다. 또한 지하철은 인간에게서 현실과 가상세계 간의 괴리를 일으킨다. 지하철 노선도를 보면 우리는 오로지 시간을 볼 뿐이지 지역의 특성이나 동네의 분위기를 알지 못하는 체, 오로지 지역의 이름만 알 뿐이다.

마지막으로 도로의 주인이 된 것은 바로 자동차였다. 자동차는 인간 육체의 확장이다. 자동차를 통해 사람들은 개인의 지위와 부 등을 알게 된다. 이런 자동차의 발달은 도시를 균질화시키며 획알화 시켰다. 더 나아가 자동차 도로는 개인의 정체성이 필요 없고 익명의 개인, 오로지 질주하는 개인을 탄생시켰을 뿐이다.


도시는 인문학적 연구의 무대!


대한민국의 도시 계획은 효율성과 경제성에 따라 움직이고 있다. 어쩌면, 지금의 대한민국의 도시 계획의 문제점은 1970년대 압축적 근대화에 따른 것이다. 대한민국은 경제적으로 후진국에서 선진국으로 발전되었다. 당연한 논리겠지만, 압축적으로 근대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경제적 효율성만을 따질 수 밖에 없다. 경제적 효율성을 따지다 보니 서울은 인문학적 사고나 생각을 할 수 없는 도시가 되어 버렸다. 대한민국을 걸을 때마다, 내가 느끼는 감정은 '불안'이다. 마치 강남역에 있는 어떤 영어 학원의 초침까지 보이며 움직이라는 시계처럼 말이다. 효율성의 가치는 도시로 형상화 되었고, 사람들을 계속 달리게 만든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성장, 성장'을 외치며, 다시 경제 성장률 7%의 기억으로 살아간다. 하지만 대한민국에는 그런 동력은 사라진지 오래다. 나는 대한민국의 경제 성장에 대해 자랑스럽게 여긴다. 하지만, 우리가 압축적 근대화를 통해 잃은 것은 너무 많다. 그 중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바로 사유하는 공간이다. 도시계획은 계속 계속 이어질 것이다. 하지만, 철학이 있는 도시 계획과 철학이 없는 도시 계획 속에서 서울이라는 도시를 유지시킬 수 있는 것은 인문학적 사고다. 도시는 내가 사는 곳이다. 도시는 나의 거울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 서울이 나를 비추는 모습은 끝없는 목적지를 향해 달리는 슬픈 인간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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