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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성 Feb 03. 2018

황교익은 떡볶이가 싫다고 하셨어

황교익과 떡볶이 논쟁

최근에 맛칼럼니스트 황교익씨와 네티즌 간의 갈등이 있었다. 어떤 방송에서 황교익씨가 떡볶이가 맛이 없다는 발언이 몇몇 사람의 심기를 건드렸던 것 같다. 나는 그의 페이스북을 유심히 관찰했다. 나는 황교익씨의 의견이 한국인의 멘탈리트를 잘 찝었다고 생각했다. 그가 떡볶이가 맛이 없다는 것은 황교익씨의 개인적인 의견이었다. 그런데, 그의 의견에 히스테릭하게 반응한 대중의 멘탈리티는 무엇이었을까. 황교익씨의 떡볶이가 맛이 없다는 아주 사소한 의견이었을 것이다. 가령, '전갈 튀김이 맛이 없다' 혹은 '고수가 맛이 없다.'는 의견과 '떡볶이가 맛이 없다.'는 본질적으로 똑같은 형태의 의견이다. 만약, 황교익씨가 방송에서 '전갈 튀김이 맛이 없다', 혹은 '고수가 맛이 없다'라고 발언했으면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왜 떡볶이는 사람들의 분노를 일으켰을까.



떡볶이는 한국인에게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어린 시절 길거리에서 떡볶이를 먹고, 초중고 학생들에게 떡볶이는 한국인의 국민 간식이다. 그렇기 때문에 떡볶이와 관련된 추억도 많을 것이며, 우리는 어린시절부터 떡볶이를 많이 접한다. 떡볶이는 어떤 이들에게는 자신의 인생의 중요한 부분 혹은 아름다운 추억일 것이다. 그런데, 황교익씨가 그 아름다운 떡볶이를 맛 없다고 하니 마치 자신의 삶 혹은 인격을 무시하는 것으로 생각될 수 있다. 이런 분노의 기저에는 '왜 내가 좋아하는데, 내가 좋아하는 것은 너는 싫다고 하냐, 내가 좋으면 그것이 옳은 것이며 진리야'라는 사고가 깔려 있는 것이다. 사실, 떡볶이라는 이런 사소한 것에서 사람들은 발끈을 하는데, 이런 일이 이번만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가령, 심형래 감독의 <디워> 논쟁에서도 진중권 교수가 <디워>에 대해 혹평을 했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진중권 교수를 죽일려고 했었다. 그 당시 대중들은 <디워>가 할리우드에 진출한 '우리나라' 영화였고 내용이 별로거나, 아쉬워도 애국심 하나로 <디워>를 옹호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사실, 한 개인의 애국심을 측정할 때, <디워>라는 영화 하나로 애국심이 있다, 없다를 판단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두 사례에서 우리가 잡을 수 있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과 '옳은 것'을 동일 선상에 놓고 본다는 것이다. 우리가 잘 범하는 오류는 바로 내가 좋아하는 것이 곧 옳다는 사고다.



우리는 누구나 삶을 살아가는데, 자신만의 기준과 신념이 존재한다.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분노하는 것은 자신의 인격이 무시되었을 때다. 이 말을 다르게 표현하면 자신이 생각하는 진리나 신념이 다른 사람에게 무시당하거나 심한 공격을 받았을 때, 공격적으로 변한다는 것이다. 당연히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신념이나 진리를 공격당하면 화를 내기 마련이다.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것과 신념 혹은 옮음이 분간이 되지 않고 하나로 엮이면 이는 귀찮게 된다. 내가 좋아하는 것이 곧 옳은 것인데 누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아니꼽게 본다면 그것은 마음에 커다란 상처를 주는 것이다. 하지만, 좋아하는 것과 옳은 것이 하나가 될 때 진정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파시즘적인 사고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나는 떡볶이가 맛있다고 생각해, 그것이 내가 생각하기에 진리야 그런데 너는 안 좋아한다고?, 너는 틀렸어. 너는 떡볶이가 맛있다고 인정해야해'라는 말은 우리 사회가 열린 사회로 가고 있는 중에 우리가 지양해야 하는 사고다. 사실 이런 사고가 아직도 우리 나라를 얼마나 많이 지배하는가. 정치색이 다르다고 상대방의 말을 듣지 않고 적으로 돌리는 행태, 영화 하나에 욕을 하는 행태, 많은 부모들이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아이들에게 강요하는 교육, 길거리에서 예수 믿는다고 해도 무작정 전단지를 들이대는 행태 같이 우리 사회에는 아직도 미니 파시즘들이 많이 존재한다.


그런데, 우리의 이런 미니 파시즘은 어떻게 형성되었을까. 내가 생각하기에 수많은 변수들이 존재하겠지만 그 중 제일 중요한 것은 교육 문제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매일매일 다섯 개의 답 중 하나를 찍어야 한다. 답을 하나 찍어야 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있어서 답은 하나, 진리는 하나, 절대로 다른 선택지는 답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전제로 깔고 있다. 사실, 고등학교 수학이야 답이 하나겠지만 국어영역이나 영어영역이 답이 하나가 될 수 있겠는가. 내가 고등학교 때 제일 싫어 했던 과목은 '국어'였다. 윤동주의 <서시>를 읽을 때, 이해가 안 갔던 것은 어떻게 <서시>가 대한민국의 독립과 연관이 되는지 이해를 할 수 없었다. 그런데, 시험은 봐야 하니까, 무작정 선생님들이 줄줄 불러주었던 필기 내용을 외웠다. 시에 대한 해석은 다양할 수 있고 그 해석에 대해 합리적인 설명이 있어야 하는데, 내가 너무 멍청해서, 윤동주의 <서시>와 독립을 나는 연결시키지 못했다. 이처럼, 우리는 답을 하나로 찍어야 한다. 절대로 다른 의견에 대해 타협은 있을 수 없다. 다른 의견을 인정하는 순간, 나는 시험문제를 틀리고 대학을 못간다. 잔인한 교육이다. 그런데, 학생일 때는 교육과정이 하나의 답을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학생들 사이에서 갈등이 일어날 가능성이 거의 없다. 문제는 성인이 되서 그렇다. 우리의 인생을 교육과정처럼 하나의 답을 가지고 있지 않다. 모두가 다양한 생각, 신념, 의견을 가지고 살아간다. 우리가 살아가기 위해서 하나의 신념이나 관점을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 즉, 모두가 각자 다른 관점을 가지고 살아가게 된다. 그런데, 우리가 사회에서 부딛히는 것은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을 만날 때다. 누군가가 나를 비판하고(욕설 제외) 나와 다른 의견을 가지면 우리는 본능적으로 공격적으로 변한다. 왜냐하면, 내가 지금 생각하는 것만 옳고 다른 사람이 말하는 것은 다 틀리기 때문이다.


사실, 황교익씨와 떡볶이 사건은 아주 사소한 문제로 치부될 수 있다. 그런데, 황교익씨와 떡볶이 사건은 우리 사회 내부의 미니 파시즘을 보여준다. 지금 우리는 민주 사회로 걸어가고 있는 중이다. 당연히 우리가 지불해야 하는 민주주의의 값이 있는 것이다. 이런 미니 파시즘을 한 번 진지하게 고민해보고 생각해보는 것은 매우 값진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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