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민성 Jun 17. 2019

'혐오경제'는 돈이 된다!

우리는 왜 혐오를 사랑하는가

그동안 논문을 집필하느라 세상과 거의 담을 쌓고 살았다. 그러다 <썰전>이 지금도 방영을 하나 검색을 해보니 3월 즈음에 종영을 했다는 기사를 보았다. 돌이켜 보면 <썰전>이나 <무한도전> 같은 굵직한 프로그램이 사라지니는 것은 슬픈 일이다. 그런데 이미 공중파의 시청률은 계속 감소하고 있었고 공중파 방송이 시청자들의 니즈(Needs)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사실 최근들어 공중파가 붕괴되는 원인은 다양하겠지만 개인적인 생각으로 두 가지 정도로 그 원인을 꼽아 본다. 첫번째는 공중파와 경쟁하는 매체의 다양성이 있을 것이다. 유튜브와 Netflix의 크나큰 성장으로 인해 소비자들은 다양한 선택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두 플랫폼의 핵심은 자신이 시청하고 싶은 프로그램을 자신이 원하는 시간에 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에 비해 공중파 방송은 일방향적인 컨텐츠 제공자로 사람들은 방송국의 시간에 자신의 시간을 맞춰야 한다. 두번째 원인으로는 제공하는 프로그램의 자극성과 깊은 관련이 있다. 넷플릭스 같은 경우도 잔인한 장면이나 성적인 장면이 여과없이 방영되며 유튜브에서도 자극적인 컨텐츠가 큰 인기를 끌게 된다. 이런 자극적 컨텐츠는 사람들을 중독시키며 기존의 컨텐츠들을 무미건조하게 만들어 버린다. 자극적 컨텐츠들의 범람은 기존의 산업에도 영향을 미치는데 규제가 있는 공중파 방송과 재미 없는 책을 출판하는 출판산업이 점점 힘들어지는 것과 연결된다.



그렇다면 다음으로 드는 의문점은 도대체 '자극적 컨텐츠'란 무엇인가? 자극적 컨텐츠는 아프리카 TV에서 시작되었다. 이때의 자극적 컨텐츠는 원초적이고 가학적인 자극성이었다. 단시간에 다량의 소주를 먹는 것, 지하철에서 소리를 지르는 것, 변기통에 빠진 라면을 먹는 것과 같이 상식을 벗어나는 행위를 하는 것이다. 사실 이런 자기 학대적인 컨텐츠를 누가 보겠냐고 하겠지만 2010년대 초반에 이런 컨텐츠들은 사람들에게 많은 열광을 받았고 지금은 상대적으로 감소를 했지만 지금까지도 나름의 시장을 구축하고 있다. 그런데 2018년 후반부터는 자극적 컨텐츠의 의미가 변화하기 시작한다. 최근의 자극적 컨텐츠는 바로 '감성적 혐오 컨텐츠'다. 이런 혐오 컨텐츠는 어떤 집단을 상대로 혐오를 자행하는 것이다. 특히, 최근에 혐오 컨텐츠의 두 축은 남녀갈등과 보수와 진보의 갈등이다. 문제는 이런 혐오 컨텐츠는 그럴듯한 언변으로 이성적으로 보이지만 대부분이 논리에 비약이 있으며 허술한 근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논리적 비약을 매꾸는 것은 바로 감성에 호소하는 것이다. '우리 집단은 차별 받는다, 우리 집단은 역차별을 받는다'라는 프레임을 씌우기 때문이다. 감성과 궤변이 난무한 컨텐츠 속에서 많은 사람들은 생각을 하지 않고 혐오 컨텐츠를 소비하는 소비자가 되어 버린다. 즉 이제는 감성적 혐오 컨텐츠는 사람들의 호응을 받으며 이는 돈이 되는 것을 사람들이 인식한 것이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이 서로를 저격하고 갈등을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음으로 우리는 왜 혐오 컨텐츠에 열광하느냐는 질문이 남게 된다. 혐오 컨텐츠가 계속적으로 공급되는 것은 시장의 논리에 따라 수요가 있기 때문이다. 이는 프랑스의 철학자 르네 지라르의 <희생양>을 보면 추측해볼 수 있다. 르네 지라르는 모든 사람이 사회 속에서 같은 욕망을 욕망한다고 한다. 이를 한국 사회에 적용해보면 부자가 되는 것, 좋은 사람과 결혼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시장의 논리에 따르면 자원은 한정되어 있으며 모두에게 고루 분배되지 않는다. 즉, 돈을 많이 가진 사람과 못 가진 사람이 존재하게 되고 결혼을 하는 사람과 못하는 사람이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특히 지금의 한국 사회에서 이런 갈등은 양극화로 나타나게 된다. 그리하여 사회는 갈등의 장으로 변모하며 사회자체는 불안하게 된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사회의 안정을 위해 희생양을 만들게 된다. 과거 로마와 이스라엘 제사장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것이나 나치가 유대인들을 학살한 것은 이와 같은 논리다.  르네 지라르는 사회에서 희생양을 선택할 때 두 가지를 기준으로 삼는다고 했는데 첫번째로 사회적으로 튀고 두번째로 사회적 약자로 희생양으로 삼는다고 하여도 보복이 불가능한 존재를 선택한다고 하였다. 르네 지라르의 희생양 이론은 훌륭하지만 현대 사회에서 희생양은 절대적으로 약자를 타겟으로 삼지 않는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희생양은 오히려 약자 집단이기 보다는 다수를 차지하며 일정의 특권을 누리고 있다고 생각이 드는 집단을 혐오한다. 남성과 여성은 서로를 혐오하고 진보와 보수 또한 서로를 혐오한다. 그리하여 서로 갈등을 하게 되고 공격을 받으면 서로 보복을 한다. 르네 지라르의 희생양 이론에 따르면 혐오를 하고 희생양을 만들면 그 사회의 불안 요소는 사라지게 되지만 지금의 혐오사회에서는 갈등이 무한 반복되며 사회적 갈등은 해소되기 보다는 끝없는 혐오 컨텐츠으 재생산이 발생된다. 이제는 이런 혐오 컨텐츠의 재생산은 누군가에게는 금전적 이득을 주며 또 어떤 이들에게는 카타르시스를 제공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최근에 어떤 커뮤니티에서 한 네티즌이 자신이 쓰레기 택배를 받았다고 거짓 게시글을 쓰며 자신을 금전적으로 도와달라는 글을 업로드했었다. 이 게시글이 대박을 치고 사람들을 속일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이 혐오를 당했고 감성적인 컨텐츠가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100분 토론에 나타난 반지성주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