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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성 Oct 15. 2019

누가 설리를 죽였는가?

나는 대한민국의 악플러들이 증오스럽다.

오늘 설리가 목숨을 끊었다. 어제인가?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설리에 대한 글을 3년전에 썼었다. 그 글은 끝없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고 있다. 설리가 자살을 했다는 기사를 보았을 때 오보인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것은 사실로 드러났다. 이번 설리의 사망 소식은 참 마음이 아프다. 설리가 악플을 본격적으로 받았을 때는 2016년이었을 것이다. 설리가 인스타그램에 올려 놓은 사진이 노브라인지 아닌지에 대해 언론의 기자들이 이를 기사로 올리고 수많은 대중이 그녀에게 욕을 해댔다. 그 사건 직후 설리는 언제나 문제의 아이콘이 되어 3년 동안 대중의 욕을 들었다. 


도대체 악플러 너희는 누구냐?


연예인도 악플을 달리는 시기에 나도 악플을 달려 보았다. 디즈니의 한 영화를 논평 했는데, 그게 사람들의 비위를 건드렸었나 보다. 3달간 악플이 시도때도 없이 달렸었는데 악플은 전염병처럼 무서운 것이다. 한 사람이 악플을 달면 그때부터 악플은 끊임없이 달리게 된다. 첫번째 악플을 단 사람은 아무 생각도 아니겠지만 첫번째로 악플을 단 사람은 일종의 방아쇠 역할을 한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돌을 던지고 싶어한다. 그러나, 그것이 자신의 양심에 위배가 되기 때문에 돌을 던지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한 사람이 돌을 던지는 순간 양심의 끈을 잡고 있던 개개인들은 대중의 이름으로 한 개인에게 돌은 던진다. 그때만 생각하면 참 치가 떨리는데, 비판을 받았던 이유를 한 마디도 요약하면 '나는 이 영화를 재밌게 보고 좋아하는데 너는 싫어해? 나쁜 놈아!'라고 할 수 있다. 나는 내 자신이 어떤 상황이 와도 이성적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전혀 그렇지 못했다. 멘탈이 무너지기 시작하고 하루하루가 고달팠다. 그 글을 비록 내리지는 않았지만 성난 대중에게 사죄하는 것으로 악플 퍼레이드는 끝이 났다. 이렇게 세 달간 악플을 보는 것 자체도 힘이 드는데 설리가 악플을 볼 때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악플이 달렸을 때 화도 나고 얼마나 괴물같은 사람이 나에게 악플을 다는지 궁금해서 그들의 페이스북을 찾아가 보았다. 그런데, 나에게 심각한 욕을 하고 악플을 달았던 사람들 대부분은 누군가에는 선량한 가장이며, 좋은 친구들을 두었고, 쾌활하며, 열심히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그때 깨달았다. 악플러는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왜 악플러들은 악플을 달까?


사회에서 우리의 이웃들은 왜 악플을 달까? 설리의 노브라 사진에서 사람들이 욕을 하는 주된 심리는 '내 자신이 설리같은 애보다는 낫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사실, 나 또한 이슈가 되는 글을 쓰면서 많은 댓글과 직면하게 된다. 그런데, 우리의 선량한 이웃이자 악플러들은 연예인이나 글을 쓰는 사람의 우위에 서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것 같다. 악플을 달면서 저명한 학자들을 욕하고, 마치 자신의 판단이 언제나 옳다는 생각에 잠긴 사람들은 쉽게 악플을 달아 버린다. 설리에게 욕을 했던 사람들은 설리가 하는 행동이 매우 도덕적으로 상스러워 보이고 자신이 설리보다는 도덕적으로 고결하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사실 설리가 노브라던 아니던 그것을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올리던 말던 그것은 개인의 자유다. 그런데 그 자유를 자신의 의견이나 도덕적 관념에 적합하지 않다고 하여 마녀재판을 하듯이 후려치는 것은 폭력이다. 그 결과가 한 사람의 극단적 선택을 하게 만들었다. 악플러들은 자신의 존재 자체를 남과 비교하여 형성하기 때문에 누군가를 욕하고 그 사람을 비하하면서 자신을 높이는 방법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사람들이다.



악플러는 주체성이 없기 때문에 악플을 단다.


다른 나라에도 악플이 존재하겠지만 유독 한국에서 악플이 창궐하는 것은 한국인에게는 정체성이 다른 나라에 비해 부족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방법은 학력, 사는 곳, 돈이 얼마나 있는지, 나이를 얼마나 먹었는지다. 모든 조건이 외적으로 결정되는 사회기 때문이다. 우리는 처음 만나면, '어디 사세요?', '몇 살이에요?'. '고향이 어디에요?'. '무슨 대학 나왔어요?', '대기업 다니세요?', '직업이 뭐에요?'라는 질문으로 상대방을 알아본다. 문제는 이런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개인들은 끊임없이 외적인 요소에 집착을 해야한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진정으로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의견을 가지고 있는지, 어떤 꿈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한 생각할 시간 자체가 부재하다. 즉, 외적 요소를 가지고 자신의 정체성이나 존재를 구성하기 때문에 우리 한국인들은 토론을 하지 못하고 획일화된 모습을 지향할 수 밖에 없다. 모든 것을 외적으로 판단받는 사회 속에서 정체성 또한 외적으로 형성되는 이 사회 속에서 한 개인이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방법은 바로 남보다 자신이 더 우월하다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 앞에서 했던 질문들 또한 자신의 정체성이 남과 비교할 수 밖에 없는 진문들 뿐이다. 어디 사는가에 따라 자신은 잘 사는 지역과 못사는 지역에 따라 자신의 계층을 나누고, 나이에 따라 자신의 위와 아래를 나눈다. 고향에 따라 자신의 고향 사람과 아닌 사람을 나누고, 대학에 따라 상위 대학과 하위 대학을 나눈다. 자신이 다니는 회사 연봉에 따라 위와 아래를 나누는 사회 속에서 우리 사회는 필연적으로 모두가 누군가를 밟고 올라서야 하는 운명을 타고난 것이다. 악플을 다는 사람들은 하늘에서 혜성처럼 등장한 것이 아니다. 단지,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고 싶기 위해서 끊임 없이 자신을 높이고 싶은 자존감이 낮은 못난 사람들이 설리를 죽음으로 몰고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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