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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성 Nov 22. 2019

펭하! 펭수는 어떻게 밀레니얼 세대를 사로잡았나?

펭수 신드롬


밀레니얼 세대가 펭수에게 열광하는 이유


남극에서 온 팽귄이 대한민국을 뒤흔들고 있다. 카톡에 친추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 하나 둘 자신의 사진을 펭수로 바꿔놓은 것을 보며 궁금증이 생겼다. 그리하여, 유튜브에서 펭수를 찾아 보았다가 1시간 동안 펭수 영상만 보았다. 펭수는 매력적인 캐릭터다. 펭수는 어떻게 보면 젊은 세대를 대표하는 캐릭터다. 펭수는 EBS사장의 이름을 부르며 권위에 대해 반감을 가지는 밀레니얼 세대의 코드를 아주 잘 건드렸다. 펭수는 탈권위적인 모습을 보이는 동시에 버스킹을 하고 오디션을 하며 도전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알바도 하면서 말이다. 또한, 셀카와 자신을 표현하는데 열중하는 밀레니얼 세대의 모습과 펭수의 나르시시즘적인 모습 또한 동질감을 느끼게 만드는 요소다. 펭수는 어떻게 보면 현재 소비의 주체가 되어가는 밀레니얼 세대과 너무나 닮았다. 그러나 밀레니얼 세대와 펭수가 차이점을 보이는 부분은 펭수라는 캐릭터가 솔직하고 직설적이고 어른 세대를 희화화시키고 블랙 코미디를 연출하는데 있다. 사회 생활을 하다보면 특히 대한민국에서 갑질을 당하기 쉽다. 그러나 아무리 갑질을 당하더라도 자신의 생존과 관련된 인물의 갑질에 대해서 젊은 세대는 참아야만 한다. 그러나 펭수는 그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상사나 동료 직원 그리고 사장까지 까버리는 속시원한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펭수가 이런 행동을 할 수 있는 이유는 펭수가 실재로 거리를 활보하고 돌아다니지만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우리 앞을 걸어다니는 펭수 그러나 존재하지 않는 펭수


펭수에 대해 생각해 보면 재밌는 부분이 나타나게 된다. 바로 펭수라는 존재가 실재로 존재하지만 실체가 없는 허구의 존재라는 것이다. 이 부분은 주목을 해야한다. 가령, 내가 유명인이 되어 방송에서 감동적인 연설을 한다면 반응은 세 가지 일 것이다. 나를 지지하고 사랑해주는 사람, 나를 보고 뭔가 싫고 짜증이 나는 사람, 그리고 관심 없는 사람일 것이다. 세상에서 실재로 존재하는 모든 사람은 그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싫어하는 사람도 있다. 그것은 당연한 이치다. 그러나 펭수는 실재로 존재하지 않고 웃기고 비현실적으로 생긴 외모 덕분에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는다. 즉, 반대자들의 거센 반발이 나타날 수 없다. 단지, 펭수가 인기를 끌면서 상대적으로 박탈감을 느끼는 사람을 제외하면 펭수의 모습에 대해 적개심을 가지는 사람은 적을 것이다. 그러나, 펭수의 인기에 분노감을 느끼는 사람이 펭수에게 심한 욕을 하더라도 그 욕은 효력이 없다. 왜냐하면 펭수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펭수를 연기하는 사람과 펭수는 엄연하게 다른 존재다. 펭수는 욕을 먹어도 아무렇지도 않고, 펭수는 캐릭터이기 때문에 대중에게 자연스럽게 접근하며 친근한 모습을 보인다. 펭수가 젊은 세대에게 사랑을 받는 이유는 어떤 면에서 조국 교수와 진보 진영의 타락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조국 교수를 지지하는 진보지식인들과 문재인 대통령은 조국 교수의 문제를 단지 교육제도의 문제로 축소해서 생각할 뿐이다. 그러나, 밀레니얼 세대가 느끼는 분노는 바로 공정성을 이야기하던 조국 교수와 진보 지식인들이 오히려 계급성에 대해 둔감하고 권위적이며 자신의 권리를 오히려 자식에게 승계하려는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반대 급부로 많은 젊은이들은 정치인에 대한 혐오를 하게 되었다. 그때, 펭수는 권위에 대해 탈권위적인 모습을 보이며 개드립을 시전하기 때문에 젊은 사람들은 실재로 존재하는 위선적인 정치인들 보다 솔직하고 탈권위적인 허구의 존재에 열광을 하는 것이다.



펭수가 정치인이 된다면???


펭수가 큰 인기를 끌자 정부 쪽에서 펭수를 초청하고 외교부 장관이 펭수와 악수하는 모습까지 나오게 되었다. 나 또한 페수를 사랑하는 사람이기는 하지만 허구적 존재인 펭수가 걱정되는 부분이 있다. 펭수는 탈권위적인 모습을 보이지만 그 안에 내용이 전혀 없다. 당연히 예능 캐릭터에게 진지한 모습을 보이라는 것 자체가 멍청한 생각일 수 있다. 그러나, 펭수의 블랙 코미디는 권위적에 대해 반발하지만 까놓고 보면 깊은 고민 끝에 나온 블랙 코미디가 아니라 순간적인 드립이나 내용 없는 조롱일 뿐이다. 펭수의 인기에 따라 정부와 업계에서 펭수를 초청하고 있는 추세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잘 보아야 하는 것은 펭수라는 존재가 어떻게 보면 정치적 프로파간다로 이용당할 수 있다는 것이다. 펭수와 정치가 손을 잡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어쩌면 펭수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펭수가 어떤 당을 지지하니까, 아니면 어떤 정당에 호의적이니까 펭수를 찍는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다. 당연히 이것은 나의 기우이길 바란다. 그러나, 펭수의 모습은 <블랙미러>의 Waldo와 너무 비슷해 보이는 것은 나만의 착각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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