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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성 Mar 08. 2016

(피츠제럴드1) 벤자민 버튼의 시간

살아 숨쉬는 것은 곧 누워 죽어있는 것...


모든 것이 어두워졌고 그가 누운 하얀 아기 침대와 위에서 움직이던 희미한 얼굴들, 따뜻하고 달콤한 우유향이 그의 뇌리에서 모두 사라져 버렸다.
(피츠제럴드 단편선, 민음사 p43)


피츠제럴드의 소설 '벤자민 버튼의 기인한 사건'은 영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의 원작 소설이다. 하지만 영화와 내용이 다르고 단편이라 20분 정도면 잃을 수 있는 양이었다. 영화가 사랑하는 사람과의 그 주안점을 두었다면, 소설은 인간의 생과 사의 문제를 간결하지만 그 안의 의미를 두어 써놓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노인에서 어린아가 되어가는 벤자민 버튼


벤자민 버튼은 태어날 때, 70대의 노인으로 태어나 나이가 들 수록 점점 어린 아이가 되어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약간은 다른 맥락이지만, 슈퍼맨의 괴로움에 대해 생각을 해보았다. 슈퍼맨의 경우 그는 나이가 들지 않는다. 슈퍼맨에게 제일 큰 슬픔은 무엇일까? 슈퍼맨의 경우 힘도 강하고 초능력도 있으며 괴로움이라고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슬픔은 바로 사랑하는 사람의 늙어감이다. 자신은 나이를 먹지 않지만 사랑하는 사람은 나이가 들고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을 계속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벤자민 버튼은 슈퍼맨처럼 나이를 먹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자신과 관계된 사람들과의 정반의 삶을 살아가면서 그는 소외감을 받게 된다. 자네와 결혼한 아내가 늙어가는 것을 보며 사랑이 식고, 아들에게까지 구박을 받고 만다. 벤자민의 경우 신체 나이가 거꾸로 간다는 이유 때문에 사회에 적응하기가 쉬운 것은 아니다. 늙은 외모로 인해 대학에서 쫒겨나고 나중에 나이가 들어 어린이의 모습으로 군을 통솔하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벤자민 버튼은 신체 나이가 거꾸로 먹어가는 것 때문에 사회의 이방인이 되었다.



망각의 안개로 한발짝 걸음을 옮겨가는 벤자민 버튼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에서는 벤자민이 점점 어려지더라도 자신의 정신세계는 어른의 것으로 남겨져 있다. 하지만 소설에서 벤자민은 점점 신체 나이와 비례해서 지식과 학습능력, 기억을 가지고 있다. 우리도 어린 아이일 때를 기억하는 사람은 정말 극히 드물 것이다. 여기서 벤자민 버튼의 비극이 또 시작된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마음을 구성하는 것에 기억이라는 부분은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고 볼 수 있다. 왜 사람들은 누군가와 이별을 했을 때, 그렇게 아파하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그 사람과 함께한 시간이 기억되기 때문이다. 내가 어떤 사람과 매일 같은 시간에 밥을 먹다가 그 사람이 사라지게 되어 밥을 같이 먹던 그 거리를 걷게 되면 사람의 마음 속에서는 허전함을 느끼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벤자민 버튼은 점점 나이를 먹을 수록 사람들과의 기억을 잃어가며 궁극적으로는 자신이 누구였는지를 망각하기에 이른다.

살인이라는 것이 사회에서 최악의 죄가 되는 것은 인공적인 죽음이 그 사람의 생명을 무너트리는 일을 하기도 하지만 그 사람의 세계를 무너트리기 때문이다. 세상의 입장에서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존재가 사라지지만 세상은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죽는 사람의 입장에서 죽음은 그 사람의 세상이 무너지는 것과 같은 것이다. 즉, 벤자민 버튼의 망각은 바로 죽음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이다.



태어난다는 것은 죽은 것과 같다


'벤자민 버튼의 기이한 사건'은 어떻게 보면 센스가 넘치는 작품이다. 인간은 태어나고 늙어가며 죽는다. 하지만 이 소설은 점점 젊어지면서 태아의 시기에 죽음을 맞이한다. 마치 과거 미술시간에 배웠던 데칼코마니와 같은 원리이다. 과연 인간이라는 존재는 삶을 살아가는 존재인지, 아니면 죽어가는 존재인지에 대한 의문을 들게했다. 여하튼, 삶과 죽음이라는 것은 거의 비슷한 것이다. 어린아이들은 사회에서 보호받아야 할 존재라 하며, 사회 속의 이방인들이 사회화를 지나 사회로 들어간다면 노인들의 경우는 사회에서 은퇴를 하고 점점 이방인이 되어간다. 어린아이들의 경우 망강의 암흑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조금씩 지각을 해간다면, 노인의 경우는 점점 망각의 길로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삶과 죽음은 양 극단에 놓여 있지만 극단에 놓여있기 때문에 닮은 구석이 있는 것이다. 즉, 삶을 산다는 것은 나중에 홀로 이방인 되어가는 것이며, 망각의 늪을 홀로 버텨야 한다는 것이다. 삶과 죽음이라는 것은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것이다. 죽음 앞에 홀로 서서 그것을 버티는 것이 바로 삶이다.


피츠제럴드의 또 다른 작품 리뷰


https://brunch.co.kr/@minsungdkim/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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