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로사회> 한병철
요즘 <피로사회>라는 책이 핫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책을 읽어 보았다. 분량은 한 시간 반이면 다 읽을 수 있는 양이지만, 저자가 내용을 조금 어렵게 썼다고 해야 할까? 한번 읽고 이해가 안 되면 한 번더 읽어야 하는 부분들이 있었다. 쭉 읽어 보니, 새로운 접근이었다. 마치,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을 철학저서로 바꾼 느낌이었다.
부정성의 사회 : 규율사회
지금의 시대이자 포스트모던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긍정의 시대에 살고 있다. 그렇다면, 긍정의 사회라는 것이 너무 추상적이기 때문에 부정의 사회이자, 규율사회인 근대사회를 알아보아야 한다. 근대사회를 잘 보여주는 저서는 바로 미쉘 푸코의 <광기의 역사>나 <감옥의 역사>가 잘 보여주고 있다. 이 사회는 규제라는 강한 당위로 우리를 미뤄 부친다. 규제를 들이 밀면서 우리는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을 지키며, 사회에서 요구하는 사항을 따르며 살아갔다. 규칙을 위반한 사람들은, 이질성과 타자성에 의해서 광인이 되거나, 범죄자가 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광인이라는 개념에 대해서 집고 넘어가야 하는데, 미쉘 푸코는 사회가 점점 발전하고 과학과 의학이 발전함에 따라 광인들이 많아 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그동안 우리가 병으로 여기지 않았던 영역들을 연구하면서, 다양한 정신병의 카테고리가 생기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ADHD는 어린시절 아동이 집중력을 가지지 못하고 산만한 행동을 하는 것이다. 현대에서는 그들이 하나의 신경성 질병을 가지고 있는 존재로 취급되지만, 중세나 16세기에 이런 병을 알지도 못했고, 병자로 취급되지도 않았다. 즉, 사회는 계속 발전할 수록 인간을 규율의 사회로 끌려들어오게 된다. 근대의 시대에서 사회는 하나의 감옥의 역할을 했고 사회로부터 인간들은 구속을 받던 사회였다.
긍정성의 사회 : 성과사회
근대 시대가 사회에 의해 통제를 받았지만,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확대는 현대의 개인들에게 인류 중 가장 많은 자유를 가지게 되었다. 저자는 지금의 사회를 성과사회로 명명하고 있다. 성과사회에서의 전제는 바로 다원주의이다. 너와 나는 그냥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서로를 받아들인다. 이런 차이를 존중하는 다원주의 사회는 사회 내에서 하나의 법칙이나 진리를 사라지게 만들었다. 자유라는 미명하에 개인들은 자신의 자유에 대한 책임을 자기 자신이 지게 되었다. 인간은 자신의 능력에 대한 무한한 긍정으로 자신을 브랜드화시키려고 한다. 과거 고등학교 윤리 시간에 '인간은 열려있는 존재'라는 멋진 말을 들은적이 있었다. 그 당시 나는 정말 멋진 말이구나 감탄을 했었다. 하지만 이 말을 뒤로 뒤집어 보면 살벌한 의미가 되는데 인간은 열려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멋진 존재가 될 수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내포한다. 그렇다. 지금의 개인은 자신이 실패하고 낙오하는 것을 극도로 괴로워하며, 사회에서 그런 오명을 쓰지 않기 위해 자신을 착취하면서 최고의 효율성을 이끌어 낸다. 여기서 집고 넘어가야 할 것이 인간의 이런 자기학대의 모습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시스템 즉 사회 내부의 문제이다. 인간은 실패하지 않기 위해 쉬지 않으며 사회적 관계 보다는 개인을 믿으며 그 결과 파편화된 개인들은 허무함을 느끼게 된다.
피로한 사회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피로 사회는 인간에게 많은 자극과 정보, 충동 등을 제공한다. 그래서 인간의 정신은 분산이 되며, 사색할 시간을 주지 않는다. 대한민국을 봐도, 젊은이들에게 자신에게 고민을 하라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취업준비나 결혼자금 준비하기 바쁘니 그럴 시간이 어디있느냐고 할 것이다. 그렇다. 지금의 젊은이들은 너무나 빨리 달리고 멈출 줄 모른다. 저자는 이런 젊은이들을 포함해 사회의 모든 사람들에게 잠시 멈추어 자신이 누구이고, 자신이 왜 사는지에 대해서 질문하기를 원한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이 생각이 났다. 그레고르라는 외판업자가 어느 날 벌레가 되어 버린다. 그는 그 집을 부양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모든 경제적 부양능력을 상실하며 고민에 빠진다. 하지만 몇 일이 지나자 그는 벌레로 변한 자신의 몸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자신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된다. 벌레가 된다는 것은 지금의 사회에서 비추어 본다면 사색을 즐기거나, 고민을 하거나, 책을 읽는 것과 같이 비경제적인 활동을 하는 것으로 읽혀낼 수 있을 것이다. 경쟁 사회 속에서 카프카식의 벌레가 된다는 것은 무의미한 것일 수 있다. 하지만 잠시 멈추고, 쉬고, 생각하는 것이 무능력하게 보여지는 것은 아마 이 시대가 최초가 아닐까 싶다. 즉, 우리는 이런 사회 속에서 그 흐름에 대해 멈춰설 용기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 용기를 가진 사람의 수가 점점 많아진다면 지금의 피로사회는 더 멋진 신세계로 넘어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