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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성 Mar 31. 2016

모든 것을 표현할 수 없는 언어, 언어로 극복하다

교육을 바라보는 관점(2) : 문자와 교육


몇 년전 <뿌리 깊은 나무>가 사람들의 눈을 사로 잡았다. 실제 역사가 그런지 안 그런지는 불명확하나, 드라마를 기준으로 봤을 때 글자라는 것은 중요하다. 양반에게 글자라는 것은 백성과 자신들을 구분 짓는 권력의 울타리 역할을 백성들에게는 아는 것의 힘 즉 삶이 힘들어도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자신의 이권을 조금이나마 지킬 수 있는 무기가 된다.


문자와 사고의 측면에서 뭐가 뭔저냐는 닭이 먼저냐 계란이 먼저냐는 논쟁과도 같은 것이다. 그러나 하나 확실한 것은 사고에 있어 언어라는 것은 필수부가결한 것만은 확실하다. 미국 드라마 Heroes라는 드라마가 있었다. 거기서 남의 마음의 소리를 듣는 능력자가 있었는데 그 초능력자에게 심문 받던 요원은 그가 알아듣지 못하게 영어가 아닌 일본어로 생각하는 것을 보았다. 이것이 진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언어가 없는 사고는 존재할 수 없다고 본다.


그렇다면 인간의 사고는 언어가 필요하다. 그런데 일부 사람들은 언어의 모호성에 관해 우려를 나타낸다. 언어의 모호성이라는 것은 과연 내가 말하는 것이 세상의 모든 것을 표현할 수 있는가? 아니면 세상의 것 뿐만 아니라 세상 저 편에 있는 것 까지 표현할 수 있느냐?에 대한 질문이다. 이 질문을 쉽게 예를 들자면 '당신의 언어로 신을 , 이데아를 , 道 ,를 표현할 수 있습니까?'로 예를 들 수 있다. 아마 이런 형이상학적인 것을 말로 표현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이에 대해 우리는 2가지 관점을 가질 수 있다. 형이상학적인 것을 믿지 않을 것인가? 아니면 믿을 것인가?

전자의 경우에는 언어의 모호성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형이상학적인 것들을 말로 표현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고 후자에게 있어 문자의 모호성은 정말 골치아픈 문제가 된다.


고르기아스


그리스 시대의 소피스트인 고르기아스가 이에 대해 대표적인 인물이다.

고르기아스는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이 주장하는 형이상학적인 개념에 대해 이렇게 반론한다.

1. 본 적 없어 있으면 (Idea같은 것) 가져와

2. 있다고 칩시다. 지금 현상에서 우리는 느끼는데 있는지 없는지 어떻게 알아?

3. 백번 양보해서 내가 우연히 (Idea같은 것을)알아도 전달가능한 것이냐?


고르기아스의 이런 질문을 현대의 실증주의자들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고르기아스의 질문은 너무나 날카롭다. 그래서 이를 반박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한 쪽에 고르기아스가 있듯이, 다른 한쪽에는 플라톤과 소크라테스가 있다. 그렇다면 이들은 이것을 어떻게 반박했는가?



고르기아스의 반박에 대해 플로톤이 취한 방식은 바로 '논리적 추론'방식이다.

논리적 추론 방식에는 2가지 방법이 있다.

1.상대의 반박을 받아들이고 그 뒤에 증명을 하는 방법

2.명제 이전의 전제를 증명해 보이는 방법


플라톤학파는 1번의 방법을 사용했다.

내가 비록 이데아는 보지 못했어, 그러나 그것이 있는 것은 확실해!

이것을 쉽게 설명하려면, 성직자의 예를 들겠다. 성직자에게 있어 신을 직접 자신의 감각으로 느낄 수는 없다. 그러나 성직자들이 설교를 할 때 꼭 받아들여야 하는  전제가 있다. 바로 '내가 신은 못 보았지만은, 신은 있다.'라는 전제를 받아 들여야 한다.  즉 논리적 가정에서는 우리가 받아들여야 하는 전제가 있는 것이다. 바로 그것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형이상학적인 것을 증명하는데는 2 세계 간의 관계를 해명해 의해 증명된다.


그럼 다신 언어로 돌아와서 우리는 플라톤 학파의 관점을 받아 들고 언어의 모호성을 극복하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그렇다면 행동이 언어를 극복할 수 있을까? 언어는 그럴 수 가 없다.

첫번째로 의미 부여가 되지 않은 행동은 몸부림이고

두번째로 행동은 넓은 범위의 언어로 그 오류가 더 클 수도 있다.



그렇다면 언어의 모호성을 극복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1. 언어로 언어를 극복한다.

언어라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을 100% 설명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신을 이해한다고 가정했을 때

내 마음속의 질문을 계속 던지는 것이다. 이는 고민하는 힘으로 자기가 빈칸을 매꾸는 것이다.

비록 형이상하적인 것은 100%만족 못했도 99%까지는 이해할 수 있다고 본다.


2. 완전성과 불완전성

이는 논리적 추론 방식의 연속상인데 우리는 완전성을 전제로 하여 불완전성을 인식해야 한다.

가령, 우리는 도덕 공부를 하면서 비도덕적인 우리를 인식하고 그것을 고치려는 노력을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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