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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성 Apr 18. 2016

대학은 학문하는 사람을 만드는 곳이다.

교육을 바라보는 관점(3) : 피터즈의 성년식의 개념

드루 길핀 파우스트(Faust·60)


하버드 최초 여성 총장이 된 파우스트 총장은 자신의 취임 연설에서 교육의 본질에 대해 질문을 던졌다. "대학은 목수를 만드는 곳이 아니라, 목수를 인간(학문하는 사람)으로 만드는 곳이다.' 그녀는 지금 대학들이 직업 양성소를 변질된 것을 비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학이라는 곳이 아니 학교라는 곳이 직업 양성소가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인가? 학교는 무엇을 하기에 사람을 만드는 곳인가?



가령, 이런 질문을 던져보자! 이는 윤리적 질문이다. 수학의 가치는 무엇인가? 아님 수학은 왜 가르치는가? 이 질문에 당신은 무엇이라 답하겠는가? '아 논리력을 높일 수 있잖아!' 이것이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답일 것이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자 논리력은 다양한 방법으로 길러질 수 있다. 다시 말해 논리력이라는 목적을 위해 수학은 수단화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수학의 가치가 논리력의 시녀가 된다는 말과 같은 것이다. 이것이 수학의 가치인가?


사람들이 어이 없어 할지 모르지만 수학의 목적은 나도 모르고 사람들도 모른다. 즉 수학의 목적에 대해 우리는 정당화를 할 수가 없다.  여기서 피터즈의 상심을 옅볼 수 있다. 피터즈는 '과목들을 왜 가르치는가?'를 알리고 싶었다. 피터즈는 칸트의 '논리적 추론'방식을 적용해 이를 증명한다. 즉 내가 학문의 가치는 알지 못하지만(전제를 받아 들임), 왜 가르치는 가치가 있는지 그것은 증명 가능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피터즈의 증명을 설명하는 것은 너무나 복잡하기 때문에 생략하기로 하고 그의 대답을 설명하겠다. 피터즈는 교육이라는 것이 가치를 보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는 교육을 통해 인간 내면의 변화를 일으키려는 노력을 중시했다.


그런데 여기서 질문을 할 것은 우리가 배우는 국어나 수학 과학 등을 배워 인간의 내면 가치를 바꿀 수 있느냐에는 의문이 생길 것이다. 수학을 배워서 내면의 가치가 바뀐다는 것인가? 국어를 배워서? 과학을 배워서? 솔직히 수긍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또한 이런 가치가 있다고 가정하면 어떻게 그것을 전달하는 것인가의 문제도 생긴다.



피터즈는 이런 질문에 이렇게 대답한다. 과학 수학 국어 선생들은 이미 가르칠 때 가치로운 행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즉 이미 가치를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학생들이 이런 가치를 느끼고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단, 학생의 태도는 이를 적극적으로 받아 들여야 한다. 또한 여기서 과학의 가치 국어의 가치 수학의 가치는 그 학문을 사랑하는 마음과 그것을 계속 공부하겠다는 마음이다. 하지만 이런 논의는 제한점이 있다. 바로 학문하는 사람에게 가치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학교로 오라는 것이다. 학교에 와서 배워서 학문하는 사람이 되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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