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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성 Jun 01. 2016

홍익대 앞에 나타난 거대한 일베 조각상 그리고 일베

홍익대학교 일베 조형물 사건

홍익대학교 앞에 거대한 일간 베스트를 상징하는 거대한 손모양의 조각상이 나타났다. 이 조각상은 조소과 학생의 작품이었고, 작품의 위치 때문에 홍익대학교 학생들과 많은 언론에 의해 주목을 받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조각상을 만든 학생의 작품을 혐오하며 쓰레기로 치부하지만 나는 이 조각상을 만든 학생의 발표된 의도 안에는 무엇인가가 더 있는 것 같고 지금 진지하게 이런 글을 쓰고 있는 나 또한 일베와 그 학생이 만든 무대 위에서 놀고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처음에는 일베라는 존재가 병신들의 모임 그 이상, 그 이하로 보지 못했다. 하지만 그들의 정신세계를 먼저 바라보고 그것을 기준으로 홍익대학교 앞에 있었던 거대한 일베 조각상을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아는 동생이 홍익대 일베 조각상 사건 요약해 놓은 것


<일베의 사상>에서 저자인 박가분은 '일베 유저들은 인터넷에서 사실상 모두가 우스운 인긴이라는 인식,이를테면 자신의 외설적인 성적 판타지를 공공연히 드러내며 우스워질 수밖에 없다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여기서 일베는 그렇다면 모두가 그러한 우스운 인간에 걸맞게 행동해야 한다는 모종의 강령으로 도약한다. 그들의 우파 성향은 인터넷에서 국가와 사회를 향해 무언가를 위선적으로 요구하는 대신 자신들끼리 평등한 병맛이 되는 것에 의해 현실의 국가와 사회를 넘어선 자율적인 공동체를 만들 수 있다는 좀 더 근본적인 사상에서 비롯된다'라고 그들의 정의내리고 있다. 즉 일베 그 자체는 사회 속에서 자신들의 행동을 보여주지 못하지만 인터넷 속에서 익명성의 이름의 자신의 욕망을 보여주는 존재들이다. 솔직히 일베의 관점에서 모든 인간은 욕망을 추구하는 존재로 모두가 똑같은 존재들이다. 그래서 일베에 대해 논리적이고 현학적인 문체로 그들을 비판하는 것은 그들에게 어떤 흠집도 내지 못한다. 왜냐하면 일베를 비판하고 까면 깔수록 비판하는 사람은 점점 일베들과 동급으로 내려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을 비판하던 사람들은 일베의 희화화 대상이 되며 타락의 길을 걷게 되는 것이다. 


일베의 이런 모습을 잘 보면 영화 <다크나이트>에 나왔던 조커와 같은 모습을 취한다. 조커가 고담에서 보여주는 모습은 바로 혼란 그 자체다. 조커는 언제나 배트맨이 자신을 죽이기를 원한다. 왜냐하면 배트맨이 그를 죽이면 배트맨이 언제나 신념으로 가지고 있던 불살생을 어기기 때문에 조커와 다를 것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조커는 자신의 목숨을 걸어서라도 대상을 희화화시키려고 하는 것이다. 배트맨이 조커를 죽이면 배트맨이나 조커 모두가 병맛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조커는 그 죽음을 통해서 자신의 자의식을 확고히하게 되지만 배트맨은 자신의 자의식을 잃어 버리게 된다.


일베는 많은 존재들을 혐오하는데 그들은 특정 지역, 여성, 진보세력을 조롱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누구나 혐오할 권리를 가진다고 믿는다. 일베들이 웃긴 것은 그들이 기성세대에게 도전하는 방식이다. 그들은 기성세대가 은폐하는 여성의 차별, 지역 감정 등을 공공연하게 들추면서 오히려 기득권들에게 도전장을 내민다. 왜냐하면 기존의 기득권들은 사회의 이런 문제들을 잘 덮고 조용히 넘기기를 원한다. 하지만 일베는 이런 보이지 않는 혐오를 사람들에게 보여줌으로 동시에 권력가들에게 까지 귀찮은 존재들이 되어 버린다. 그런데 일베가 더 골 때리는 것은 그들의 외부에 대한 혐오가 바로 자기 자신들의 혐오로부터 시작이 된다는 것이다. 그들은 현실 속에서 자신들을 바라보며 자신의 삶을 혐오하기도 하고 자신의 처지에 대해서도 혐오적인 태도를 보인다. 자신을 혐오한다는 것은 자신을 저 위에서 내려다 본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즉, 자신의 행동이 혐오스럽다는 것을 인지하는 것이다.


<일베의 사상>을 쓴 박가분의 말처럼 일베는 미학적 공동체의 모습을 보여준다. 일베는 자신들이 병맛스러운 행동을 하는 것을 이미 인지하고 있지만 현실에서 절대 불가능한 것들을 하게 만드는 행동을 한다. 일베가 미학적이라는 것은 현실 속에서 자신들이 혐오를 하고 혐오되는 과정을 통해 타락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그 타락 속에서 일베라는 자의식이 더 빛이 난다는 아이러니를 가지고 있다. 그냥 쉽게 말하면 일베는 자신들이 비판받고 욕을 얻어 먹으면서 사회 내에서 미친놈 취급을 당하지만 그 과정 속에서 자신들의 이름과 위상 관심은 더 커진다는 것이다. 그 속에서 그들은 관심병을 뛰어 넘어 일베라는 자아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나는 이 홍대 앞에 나타난 조각상을 보면서 만든 사람의 이야기를 생각해보았다. 그는 논란이 일어날 줄 알았고 이분법적으로 보지 말자는 이야기를 했다. 먼저 이분법적으로 보지 말자는 것은 작가 자신이 일베냐 아니냐 그런 논쟁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내포한다고 본다. 하지만 그가 이미 논란이 있을 것이라고 한다면 과격한 행동까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않았을까? 나는 그가 조각상을 만드는 것이 솔직히 일베의 사상을 정말 제대로 담고 있다고 본다. 그가 일베 조각상을 학교를 대표하는 정문에다 전시한 것은 홍익대를 일베와 같은 동급으로 떨어트린 것이다. 외부인들과 언론은 추후에 밝혀지는 작가의 설명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그들이 주목하는 것은 일베 조각상이 홍익대학교 앞에 세워진 것에만 집중을 할 것이다. 건물 앞에 조각이라는 것은 그 건물의 가치를 집약해서 보여주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일베 조각상은 미술에서 최고 대학인 홍익대학교를 일베의 저급한 문화와 동일시한 것이다.



솔직히 예술에 대한 담론이 학우들 사이에서 더 일어났으면 한다는 것은 개소리다. 왜냐하면 이 작품에 대해서 이것이 예술이냐 아니냐는 것은 문제의 요가 아니다. 홍익대학교 커뮤니티나 페북에서 학생들과 외부의 사람들이 모두 분열되고 서로 혐오를 하고 감론을박하는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여기서 일베나 작가는 아마도 이 작품을 바라보는 비판자들 또한 혐오하는 모습을 보면서 좋아할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들이 혐오를 하는 것이나 학생들이나 네티즌들이 혐오하는 것이 무엇이 다른가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어제 저녁에는 어떤 정신나간 레퍼가 이 조각상을 부셔버린 것을 통해서 모두가 바보가 되버린 것이다. 솔직히 이야기해서 이 조삭상을 적법한 절차를 통해서 내려졌다면 일베와 학생들 사이에서 비긴 정도로 끝났겠지만 이 조각상이 분노와 혐오를 통한 파괴라면 일베의 레벨로 모두가 떨어진 것이다. 일베가 이긴 것이다. 위의 사진에서 나온 것처럼 부셔진 일베 조각상은 우리에게 공허함만을 남길 뿐이다.


그동안에 일베를 혐오하던 사람들은 자신들이 일베와 다르고 민주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전제하에 그들을 비판했다. 하지만 일베 조각상을 민주적 절차를 통해서 철거한 것이 아니라 분노와 법에 의거하지 않고 분노와 혐오로 폭력으로 부신 것은 과연 우리와 일베의 차이를 찾아 보기란 힘든 것 같다. 정신나간 레퍼 때문에 모두가 바보가 된 것이다. 한심한 레퍼 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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