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페나메나 Apr 29. 2021

너 자신을 알라

 왜 이렇게 맘의 여유가 없는가? 충분하지 않나? 꽤나 늦게 택시를 타고 출근해 꽤나 일찍 택시를 타고 집에 돌아오지 않나? 그런데 왜 내가 산 키보드에 전원이 들어올 날이 없고 새로 산 플레이스테이션5를 방치하는 것일까. 좋은 상황 아닌가? 취직의 스트레스는 없애면서, 업무의 스트레스 마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 관계에서 스트레스를 받는 것 또한 그다지 아닌 것 같다. 그런데 왜? 왜 나는 글을 쓰지 않는가. 꼭 여자친구와 잠깐 헤어지고 머리가 어지러워야 나는 나를 바로잡을 마음이 드는 것인가? 나는 왜 잠을 미루나? 그렇게 미루고 또 미루면서, 왜 아무것도 하지 않는가? 왜 음악을 듣지 않는가. 왜 잠깐 틈틈히 여자친구에게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전하지 못하나. 아무리 봐도 내 앞엔 꽃길과 내 발엔 분홍신이 신겨져있지 않는가? 도대체 뭐가 문젠가.


 나는 최근에 분홍색 라벨이 달린 위스키를 주문했다. 나는 그 사실을 여자친구에게 전하면서 그냥 “이뻐서”, “방에 두고 싶어서”라고 말하였다. 나는 그러니까 이쁘다고 이십만원이 넘는 금액을 거리낌 없이 던진다. 좋지 아니한가? 뭐가 불만인가. 나는 사는 물건을 주위 사람에게 숨기는 사람이다. 사람들에게는 “허허 너무 비싸네요.”라고 말하며 엄마 카드로 긁고 배송 받아 방안에 두는 타입이다. 맛있는 것을 먹고, 화려한 곳에 가고 그것을 인스타에 올리지 못하는 사람이다. 모든 조건은 갖춰져있는 것만 같다. 그런데 왜 나의 글은 멈춰있나? 정세랑을 만나겠다는 호기는 어디로 갔나? 


 최근에 한 에세이집을 조금 읽었는데, 읽으면서 내 글이 가지지 못한 것을 알 수 있어 좋은 독서 경험이었다. 그것들은 ‘확신’과 ‘타인’인데, 남에게 관심이 없는 것이 타인을 지운다는 것은 그러려니 하지만 내 글에 ‘확신’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후 조금 간담이 서늘해졌다. 그리고, 타인도 더욱 적극적으로 이용할 필요가 있다. 사람들은 권위있는자들의 말을 인용하며 자기 글의 호소력을 높이지 않나? 플라톤마저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려 말하는데, 나는 뭐가 잘났다고 내 입으로만 이렇게 떠드나? 다시 돌아오면, 확신이 없다는 것은 가장 큰 문제다. 사실 나는, 나의 확신 없는 이 글쓰기 스타일을 좋아하는 편이다. 그런데, 이대로라면 내 글은 아무도 사랑해주지 않는 글이자, 나에게 도움도 안되는 말그대로 해우와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아니, 그렇게 근심을 날려주지도 않고, 잠시 잊게해주는 것 뿐이다. 그래서 말인데, 나는 오늘 조금 확신을 가지고 타인의 얘기를 할까 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휘발성을 사랑한다. 하지만 누구도 나에게 미치지는 못할 것이다. 나는, 오늘도 여자친구와 식사를 하며 연극을 예로 예술의 한 덕목으로 ‘휘발성’ 을 꼽았다. 식사는 8만원 어치였고 옛날 그 식당의 맛에 비해 약간 모자라진 듯한 인상을 받았다. 나는 오늘도 집으로 가지 말아달라며 여자친구를 잡았고, 찝찝한 맘 한구석을 안고 집에 돌아왔다. 그렇게 집에 돌아오니, 위에 말한 문제 의식이 드는 것이다. 잘 시간이다! 내일은 또 대표의 재산을 불리기 위해 나를 갈아넣을 직장으로 가야한다. ‘나’는 어디있는가? 그 해삼 사이에 새우살과 다진 고기를 넣은 것을 먹는 일이 그렇게 중요했던가? 물론 여자친구와의 시간은 소중했다. 하지만, 매일 매일이 나는 시간이라는 휘발유를 내 하루에 들이 붓는데, 이 망할놈의 똥차는 굴러가지도 않고 그냥 매연만 토해내는 것이다. 그러니까, 식용유도 못되는 그냥 나는 돼지기름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나는 삼겹살을 더 적게 구워야할 필요가 있다. 술을 덜 마실 필요가 있다. 밖에 있는 시간을 줄일 필요가 있다.


 그리고 자리에 앉아 나를 자책해야하는 것이다. 글을 쓰며 나를 다잡아야하는 것이다. 확신을 가지고 나를 바꾸어야하는 것이다. 그리고, 타인의 삶을 살아야하는 것이다. 단편 소설을 다듬고 싶다. 내 더 쇼 21의 야구선수의 능력치를 키우고 싶다. 라스트오브어스 2는 커녕 1부터 깨고 싶다. 라스꼴리니꼬프가 도대체 뭘 할지 당장 알아야하는 것이다! 이런 행동들이 나를 더욱 살찌울 것이란 것을 안다. 확신을 가진다. 그런데 또 마냥 나태하게 그동안의 행동을 담습하는 것을 앞으로도 반복하지 않을까? 이러니 나는 확신을 가지지 못했던 것이다. 내 약한 의지는 확신을 불가능한 것이라 판단내린다. 사실 그게 맞다. 경험적으로 판단하는 것이다. 다 내가 똑똑해서 그렇다.  하지만, 찬스에 걸어야하지 않을까? 이 사고회로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 확신을 하고, “어차피 바뀌진 않아” 보다는 “바꾸고 말테야”, 아니, “바뀌어야해”, 아니 오히려 이 글을 읽는 당신들에게 “타인의 삶을 살아라!” 하고 강력히 주장할 수 있을 정도여야 한다. 이렇게 말하니, 조금 그럴듯한 글이 되지 않았는가? 우리는 휘발하는 것들에 대해 ‘적당히’를 마음에 새기며, 내 생활을 지키며 타인의 삶을 살아야하는 것이다. 그 행위를 통해 자신을 알아가야하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도 말했지 않나, “너 자신을 알라”. 오늘만큼은 내가 나를 정확히 알아서 하는 말이다. 당신 자신을 알아라. 이게 내 글의 주장이고, 주제다. 

작가의 이전글 으레 그렇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