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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페나메나 Jan 23. 2022

폭염철

 삶을 살수록 살아가야 한다는 이유는 점점 적어진다는 느낌이니 그 적어지는 이유에 더욱 더 집착을 하게되는 느낌이다. 어젯밤 내 분신이라 생각했던 사람을 떠나보내고 나는 그 집착한 이유들의 리스트 중 한 줄을 지웠다. 나는 한 노래를 지속적으로 튼다. 어젯밤 처음 들었던 노래다. Babyshambles의 Delivery란 노랜데, 지금의 내 상황과 맞지 않게 조금 신난다. 듣고 듣는다. 무언가를 먹지 않는다. 입이 가벼운 나는 엄마에게 어제 일을 말했고 엄마는 맛있는거라도 먹자고 말하지만 듣지 않는다. 나에겐 집착할 거리가 그렇게 많지 않다. 어쩌면 내 인생도 얼마 남지 않았을지 모르겠다.

 

 첫 경험을 했을 때가 갑자기 떠오른다. 상대는 내가 22살 때 30살이었던 내 첫사랑이었다. 첫 경험을 첫 사랑으로 했으니 꽤나 큰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어쨌든, 그렇게 첫 경험을 하고 난 후 다음날 아침이 기억난다. 날씨가 좋았다. 하늘에선 햇빛이 내리쬐고 나는 주말에도 공익근무를 나가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얼굴 만면에 미소가 끊이질 않았다. 그리고 그녀에게 사랑한다고 말했다. 좋게 끝나진 않았지만, 그립다. 살아가야할 이유가 많았을 시절이다. 그 날의 하루 전날까지만하더라도, 사랑 한번도 못나눈 채 죽기는 싫었다. 그렇게 보면 그 때 내 살아갈 이유 중 하나는 섹스였던 것인데, 그렇게 첫 섹스를 하니, 살아가야할 이유가 하나 더 생겼다. 그 누나. 그 누나가 살아갈 이유였다. 그리고, 그녀의 행복, 나의 행복, 가꾸어 나가야할 미래. 앞으로 맞이하게 될 수많은 새롭고 영광스런 순간들...


 하지만 말했듯이, 좋게 끝나지 않았다. 나는 그렇게 첫 상실을 경험하게 된다. 아프고, 앓는다. 살아가야할 이유 하나가 지워진다. 그 때 이후로 나는 조금 어긋난 사람이 되버린 것만 같다. 매우 쉽게, 이성을 유혹할 수가 있어졌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내 사람으로 만들 수가 있었다. 그 사람의 마음 속에 나라는 글자를 새기고, 그 사람의 살아 가야할 이유가 되게 만들 수가 있었다. 그정돈 아니더라도, 동력 쯤이 되는 것은 매우 쉬웠다. 나는 나의 삶에 대한 동력을 잃어갔고, 상대방을 행복하게 만들기에 집중한다. 그녀의 행복이 있지만, 나의 행복이 없다. 가꾸어 나가야할 미래, 순간들은 어느샌가 주기를 갖추고 반복하여 의미가 퇴색되고 그녀의 행복이 나의 행복이라 되새긴다. 사람들의 행복이 나의 행복이라 되새긴다. 그 후 수많은 사람들을 떠나고 떠나보내면서, 나는 어긋난 것을 넘어선 텅 빈 사람이 되버린다. 그렇게 세상의 중심이 마치 넓은 운동장만 같아서, 그 넓은 운동장에서 아무리 외쳐도 항상 이방인으로만 남았을 때, 나는 너를 처음 만났다.


 지나간 사랑, 그것도 삶을 살면서의 네번째 연애에 대해서 글을 쓰기는 첫 사랑이 대상이 아닌 첫 섹스에 대해 글을 쓰는 것 만큼도 필요하지가 않다. 너는 나에게 네번째 연애 상대였던 것이다. 앞으로 다섯번, 여섯번이 생길지 모르겠지만, 아무짝에야 쓸모 없는 것이다. 너는 내가 담배를 몇개월간은 끊게 만들었지만, 그것을 넘어서진 않았다. 내 인생의 끝에서 손을 잡고 있거나 사랑해라고 말할 대상은 당신이 아니다. 당신에게 수없이 사랑해라고 말했음에도, 모든 것을 바쳤음에도, 당신은 이제 나에게 한여름의 더위 같은 존재에 불과하다. 당신은 나를 내리쬤다. 사람의 옷을 벗게 하는 것은 바람이 아닌 햇빛이듯이 나는 당신의 사랑에 무장해제됐다. 하지만 계절은 가고, Summer가 가고 Autumn이 오듯이 나는 다시 옷을 챙겨 입는다. 전보다 더욱 두껍게.


 그렇지만 너를 처음 만났을 때, 나는 너가 내 마지막이라 느꼈다. 너의 행복 이상으로, 나의 행복을 느꼈다. 가꾸어나가야할 미래, 꽃을 주섬주섬 모아 치장을 하는데 주의를 기울인다. 앞으로 맞이하게 될 수없이 많은 새롭고 영광된 순간들을 기다렸다. 너는 나를 실패작이라 부르겠지만, 미완성인채로 나는 우리의 사랑이라는 글을 완결했다고 맘대로 판단내릴 정도로 너를 사랑했다. 그래, 당신은 나의 네번째 연애였다. 하지만 좀 더 강렬히 말하면, 나의 유일한 이유였다. 첫사랑이 나를 떠난 후, 당신만한 그럴듯한 이유를 찾을 수가 없었다. 나는 집착했고, 그게 패착이라면 패착이다. 당신에게 수없이 사랑해라 말한 모든 순간을 가슴으로 기억한다. 너는 한여름의 무더위였다. 뜨거운 열기로 나를 발가벗기고, 나를 안아주고, 나를 사랑해준 당신을 나는 잊지 않을 것이다. 가을이 오고 다시 여름이 와 똑같은 더위가 찾아오더라도, 아마 이토록 목이 마르고 애가 타고 살갗이 붉게 타버리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에게 당신은 가장 뜨거운 여름, 폭염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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