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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페나메나 Nov 03. 2018

재즈

  아침에 일어난다. 숙취가 심하다. 아침밥을 먹으라 깨우는 엄마에게 잠을 더 자겠다고 말한다. 어제 일찍 돌아온 덕에 잠은 충분히 자서, 다시 잠들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일어나려니 너무 머리가 아프다. 일단 냉장고를 열어 물을 꺼내 들이키고 화장실에서 게워낸다. 다시 눕는다. 비몽사몽한 가운데 어젯밤이 생각난다.

  지하로 내려가 가게의 문을 열고 들어간다. 재즈 공연이 있는 날이라 그런지 사람들로 가득차 있다. 연주 중이기도 하거니와 자리도 딱히 안보여 다시 문을 닫고 다른 곳을 가기로 한다. 그 때 당신이 뛰어나온다. 오랜만이라며, 내 옆자리에 앉으라며 내 팔을 잡아끈다. 살짝 망설이던 나는 그러기로 한다. 당신을 본 지 2년 정도는 지난 것 같다. 나도, 정말 반갑다. 


  그때는 몰랐다. 당신과 나는 손님과 사장의 관계로 만났다. 당시 나는 행복했다. 그렇게 일찍 여는 바가 서울에는 거의 없었다. 백수였던 나는 그 때 만나던 여자친구의 퇴근을 기다리며 그곳에서 술을 마시는 것이 일상이었다. 위스키를 마시며, 칵테일을 마신다. 과거 한남동 바에서 뵌 적이 있던 덩치 있으신 바텐더분과는 이미 상당히 친해졌다. 그렇게 자주 갔지만, 당신과는 그리 길게 말을 나눈 적이 없다. 말했듯이, 그냥 손님과 사장의 관계였다. 내 여자친구와 같이 술을 마시며 다정한 말들을 주고받는 장면도 많이 본 당신이다. 내가 행복했던 시절. 당신과 나는 그런 관계였다.
 

  여자친구의 헤어지자는 통보를 들은 바로 다음 날 나는 당신의 가게로 갔다. 별말은 안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뭔가 심상치 않은 기운이 있음을 눈치챈 바텐더는 내 앞에서 말을 아꼈다. 나는 점점 취해간다. 울거나 비통해하진 않는다. 사실 헤어졌다는 실감도 나지 않는 상태였다. 1시쯤 되었을까, 당신은 나에게 집이 어디냐 묻는다.
 

  잠깐 잠이 들었다. 깨어나보니 두통은 조금 가셨다. 다시 물을 벌컥벌컥 마신다. 이번에는 게워내지 않는다. 좀 살겠다 싶어 거실을 돌아다니니 집은 텅 비어있다. 나는 간밤에 온 카톡이 없나 확인한다. 쓸데없는 몇몇 카톡들과 스팸 문자를 확인한다. 카톡 아이콘의 빨간 숫자가 사라진다. 아직 속은 안좋아 뭘 먹을 엄두를 내진 못한다. 조금 더 정신을 차리고, 짬뽕이나 시켜서 국물만이라도 먹을까한다. 중국집에 전화를 걸으러 폰을 다시 잡는다. 그 때 카톡이 하나 더 온다. 또 그냥 후배의 잡담 문자. 다시 읽음 처리를 한다. 조금 밑으로 내린다. 그런데, 처음 보는 이름이 보인다. 대화창에 들어가본다. 당신과의 대화가 남아있다. “잘들어가.” “잘들어가요.” “미안해요.”
  

  집에 가는 것이 좋겠다며 당신은 또 한잔의 네그로니를 허락하지 않는다. 나는 조금 억울하다. 나는 취해도 진상은 부리지 않는데, 그냥 고이 들어가는데. 그냥 오늘은 좀 마셔도 되는 날이지 않나 싶다. 그런데도 당신은 나를 말린다. 시무룩해진 나는 그냥 앉아있다. 쫓아내진 말아달라 나는 청한다. 그러고마 하고 당신은 내 옆에 와서 앉는다. 나는 혀가 좀 꼬였다. 술 취해도 폼은 잡고 싶은 나는 덕분에 말을 하지 않는다. 말이 없는 것은 당신도 마찬가지다. 그냥 빈 잔, 얼음 물만 조금 남아있는 유리잔을 톡톡 손가락으로 건드린다. 담배를 피러 나간다. 담배를 피며 나는 몸을 떤다. 가을이 지나간다. 눈이 내려도 이상하지 않을 기온이다. 뒤에서 인기척이 난다. 당신이 담배곽에서 담배를 꺼내며 내 옆에 선다. 반사적으로 나는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여준다. 나는 말한다. “제가 술을 사드려도 될까요.“

  재즈 선율이 은은하다. 사람들이 많고 연주 소리도 큰 덕에 우리는 그다지 많은 대화를 나누지 못한다. 하긴 많은 대화를 할 것도 없다. 그렇게 나를 반가워 한달음에 달려 나왔으면서, 내게 등을 돌리고 연주에만 집중하는 당신이 밉다. 그러고 보니 술을 시키지 않았다. 자리에는 거의 비운 와인 한병이 있었고 나는 같은 것으로 하나 더 시킨다. 술을 많이 먹고 왔지만 이렇게 바쁜데 칵테일을 시키기도 조금 미안하다. 내 몫의 잔이 오고, 2년새 바뀐 바텐더가 내 와인을 오픈해준다. 잔에 담긴 와인을 한 모금 한다. 드디어 당신은 나를 돌아본다. ”짠“ 같이 술잔을 비운다. 그것이 우리의 마지막이었다. 아니, 우리의 한계였다.
 

  ”좋지.“ 당신은 말했다. 어느새 우리는 택시 안이었다. 나는 당신의 어깨에 내 머릴 기댄다. 그 후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단지, 다음날 잠에서 깨 몸을 뒤척일 때, 아무도 내 곁에 있지 않았다. 아무도 나를 안아주지 않았다. 마치 오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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