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페나메나 Feb 16. 2019

죽음에 대하여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있다. 글에선 첫 문장이 반이라는 말이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인 것 같다. 그런 첫 문장에 나는 저 시작이 반이라는 말을 넣었으니 얼마나 교활한가. 나는 보통 첫 문장을 과거에 짤막 짤막하게 기록해뒀던 문장에서 찾는 편이다. 그리고 그 후로 내가 타이핑 하는 대로, 그 느낌 그대로 계속 하는 것을 즐긴다. 그리고 어느덧 마지막 문장이 완성되면 나는 약간의 만족감을 느낀다. 첫 문장이 반이고, 마지막 문장이 반이다. 그렇다면 내 느낌 그대로 계속 쓰게 되는 이 중간은 무엇 일까?

 중간은 아마 공상의 영역인 듯 하다. 내가 글을 쓸 때는 보통 흐름에 맞춰 적당히 적당히 문장을 써내려가면서 진행한다. 그러다보면, 한가지 방향이 조금 잡힌다. 어떠한 흐름으로 글을 쓰다 보면 내 어떠한 사유가 이어지면 딱 좋겠다는 느낌이 든다. 그렇다보니, 중간은 흐름이다. 그리고 마지막은 경험이다. 처음은 말그대로 반이다. 처음은 말 그대로 시작이다.

 시작은 아마 동기의 영역인 듯 하다. 글을 쓰고 싶다는 욕구가 들 때도 있다. 보통 술을 집에서 한두잔 하며 음악을 들을 때 영감을 받을 때 나는 글을 쓴다. 그런데 이 영감이란게 딱히 어떤 주제를 전달해 주는 것도 아니라서 그냥 "글을 쓰고 싶다!" 라는 마음을 들게 한다. 영어 투성이인 해외 음악과 선율이 위주인 재즈를 주로 듣는 나는 어떠한 주제로 영감이 전해오는 편이 아니다. 하지만 나는 오늘 주제에 대한 약간의 영감을 받았다. 

 방금 영감이란 단어의 뜻을 확고히 하기 위해 네이버 사전을 켰다. 영.감. 을 타이핑하니 "창조적인 일의 계기가 되는 기발한 착상이나 자극"이라는 뜻이 나온다. 그러니까, 나는 약간의 착상을 가졌다. 더군다나 선율만 존재하는 재즈에서! 사실 별 다를 것은 없다. 나는 지금 Roy Hargrove를 듣고 있다. 2018년 11월 2일에 세상을 등진, 트럼펫터 Roy Hargrove말이다.

 으레 일어나는 현상이다. 어떠한 예술가가 죽으면, 특히 음악가가 죽으면 그 노래에 대한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한다. 나는 원래 이 가수를 애정했지만, 그렇게 잘 아는 것은 아니었다. 물론 지금도 잘모르지만... 어쨌든, 죽고 나서 The RH Factor - Hard Groove 앨범을 미친 듯이 돌리면서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이 앨범은 정말 엄청난 명반이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한번쯤은 들어보길 바란다. CD 콜렉터인 나는 그의 죽음을 기억하며 내 CD 진열장을 뒤졌다. 그의 CD를 사지 않았던 것 같다. 내가 매우 좋아하던 앨범이었는데! 나는 YES24, 향 뮤직 등 여러 음반 판매 점을 뒤져 그의 앨범을 사려고 노력했지만 모두 품절이었다. 죽기 전에도 품절이었는지, 죽고 난 후에 품절이 된 것인지는 나는 모르겠다. 최후의 보루인 아마존에 간다. 여기도 품절! 하지만 입고일을 예정해놨다. 나는 기분 좋게 예약을 걸어두고 가격을 지불한다. 그런데... 11월 2일에 하늘 나라에 그의 앨범은, 바로 어제 도착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CD로 그 노래를 듣고 있다. 세상을 떠난 Roy Hargrove의 대표작을 말이다. 그럼 내가 떠오른 착상은 너무나 뻔하지 않을까, 나는 '죽음'을 쓰고 싶다. 

 어제는 친구와 회를 먹었는데, 친구는 두명의 죽음에 대한 소식을 들려줬다. 그는 내가 알거라 생각한 친구라고 생각했지만 나는 두 사람 다 알지 못했다. 나는 담담하게, 아니 큰 감흥 없이 그의 이야기를 듣는다. 심지어는 너무 죽음을 곱씹지 마라라고 충고까지 한다. 정신 건강에 좋을 것이 없다고. 모르겠다. 이 말이 맞는 말이었을까? 친구가 죽은 사람에게 죽음을 곱씹지 말라고 하는 것이 가당치나 한 말이겠는가. 물론 그와도 가까운 친구는 아니어서 내가 면박을 피했을지도 모른다. 죽음은 나에게, 그렇게 멀리 하고 싶은 것일지도 모른다.

  내가 아는 친구들 몇 명도 어린 나이에 죽었다. 그다지 친하지 않아서 그렇게 크게 마음의 동요를 느끼진 않았다. 어릴 적에 으레 느끼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나에게서 많이 가신지 오래다. 나는 오늘 갑자기 엄마가 치매에 걸리는 상상을 하며 두려움에 떨었다 나 때문에 맘고생만 한 엄마에게 앞으로 효도하고 싶은 나는 절대 안된다며 몸서리를 쳤다. 나는 나의 죽음 보다는 우리 엄마의 치매가 더 무섭다. 나의 보신은 그리 크지 않다. 그저 살아 있을 때 많은 것을 즐기고 싶다. 죽게 된다면, 그리 큰 걱정은 없다. 오토바이 사고에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 내 친구의 장례식에서처럼, 나는 담담할 사람이다. 나의 죽음에 대해 말이다.

 나는 죽음에 대해 멀리 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리고 나는 죽음이 겁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둘의 문장은 그리 상반되는 것이 아니다. 나는... 많은 죽음을 생각해왔다. 정말 많은 죽음. 모두 나의 죽음에 관해서이다. 죽음이 겁나지 않는 것은, 내가 너무 많은 죽음을 생각해 와서 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사실, 나는 죽음을 멀리하고 싶다. 왜냐면 너무나 많은 죽음에 대한 생각은, 말했듯이 죽음이 겁나지 않게 만든다. 그리고 나 같은 사람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결과는 뻔하다.

 죽음을 애도한다. Roy Hargrove의 죽음을 애도한다. 어제 같이 있던 친구가 잃은 두명의 친구를 애도한다. 오토바이 사고로 성인이 되어보지 조차 못한 내 친구들도 애도한다. 모두 죽음을 두려워한다. 나도 죽음이 마냥 무섭지 않은 것은 아닐테지. 그렇다면 이미 나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테니까. 내가 만약 죽는다면, 나를 위해 애도하는 사람이 많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내가 이 트럼펫터의 죽음을 애도하는 방식처럼, 나를 즐기며 애도해주길 바란다. 내 친구들은 그럴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들이다. 남은 것은 나에게 달렸다. 적당히 인생을 즐기고, 적당히 인생을 두려워하며 적당히 성취하고 싶다. 그리고 친구들은 소주잔을 돌리며 "걔 참 멋졌지." 라고 애도하길 바란다.

 시작이 반이면 태어나는 것 또한 반이다. 죽는 것 또한 반이다. 그럼 지금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이 중간은 뭘까, 아마 내가 쓰는 글처럼, 흐름에 맞춰 적당히 적당히 사는 것이다. 그러다보면 어떠한 사유, 아니 어떠한 결론을 얻게될 지도 모른다. 그렇게 내 마지막을, 내 반을 멋지게 마무리짓고 가고 싶다.

작가의 이전글 어바웃 타임을 싫어하세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