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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페나메나 Oct 10. 2020

'고도를 기다리며'를 읽고...


 지금 내가 듣고 있는 노래는 계속 같은 가사로만 이루어져있다. 


 Ooh Ooh Baby

 Ooh Ooh Baby

 Ooh Ooh Baby


 내 인생도 비슷한 것 같다. 여자 타령, 사랑 타령,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며 살아왔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것만큼 행복한 것은 없겠지만, 약간의 Laid-Back이 필요하지 않을까싶다. 뭐랄까, 뒤틀린 내 인생.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과 행복해지기 위해 일을 한다. 힘든 것을 참아낸다. 노력한다. 반면에 나는, 사랑하는 사람과 행복한 것에서 만족을 느끼려 노력한다. 그녀와 행복하기는 하다. 하지만 무언가가 비어있다. 무엇일까? 자극? 쾌락? 아닐 것이다. 내 생각에 그것은 고도인 것 같다.


 ‘고도를 기다리며’ 의 두 부랑자들은 자기들이 기다리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채 그저 기다린다. 나는 이 책을 읽고, 나의 고도가 무엇인지 생각해봤다. 사실 베케트가 말하는 고도 자체가 뭐라고 형언할 수 없는 것임에도, 나의 고도를 규명하려 애썼다. 사람들은 다들 고도와 같은 묘사할 수 없는 무언가를 기다리며 산다. 그러니까, 고통에도 격무에도 폭력에도 인내하고 맞서싸울 수 있다. 무언가가 바뀔 것이라는 희망, 어제와 오늘이 다를 것이라는 믿음. 


 나는 고도가 없다. 고도가 없는 몇 안되는 인류일지도 모르겠다. 고도가 없다는 것은, 버텨내지 못하는 것을 의미한다. 회피하는 것을 의미한다. 시간을 떼우는데에 집중하고, 권태에 빠지는 것을 의미한다. 많은 사람들이 그들 자신을 부정적으로 보겠지만, 나만큼 하랴... 고도가 없다는 것은, 내 존재의 이유를 부정하는 것이다.


 Ooh Ooh Baby


 사랑이 고도일까? 그렇다면 나는 이미 가졌는데. 결혼을 하는 것이 고도일까? 자식을 낳는 것이 고도일까? 그렇지 않다. 고도는 생의 지속성에 필수 요소이다. 생은 지속되니, 고도는 영원히 오지 않아야한다. 고로, 고도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을 또한 의미한다. 이 알 수 없고 이루어질 수 없는 고도란 것이 모두에게 존재하는 것이 신기하다. “죽지 못해 사는거지.”에서 죽지 못하는 것이 신기하다. 만약 이 글을 읽고, 당신이 “나도 고도가 없는데 잘살아.”라고 말한다면, 나는 당신 곁에서 고도를 본다. 고도가 없는 사람들은 언제나 고도를 궁금해 한다. “나의 고도는 뭐지?” 자신에게 물음을 던진다. 그리고, 자신에게 고도를 점지해주려 부단히도 노력한다. 하지만 인생을 걸쳐 번번히 실패할 뿐이고, 회의감만 늘 뿐이다. 점점 지쳐가는 그들의 종착지는 뻔하다.


 고도를 가지려고 하는 혹은 자신도 고도를 지니고 있을 것이란 헛된 희망을 품는 자들은 고도와 함께할 수 없다. 그저, 매일 아침 “갔다 올게”, 매일 저녁 “다녀 왔어” 를 얘기하는 사람. 고도가 무언가일 필요도, 자신이 그것을 가져야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 그 자들만이 고도를 기다린다. 하지만 나는, 고도를 찾는다. 나선다. 헤맨다. 길을 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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