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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페나메나 Oct 10. 2020

My Couple of Millennium

 때는 바야흐로 1999년, 밀레니엄이란 단어가 등장하기 시작하고 뮤직뱅크에선 장발을 한 밴드 Y2K가 노래를 부르던, 그 해에 나는 초등학교 3학년이었다. 당서초등학교의 게임 잘하고 키가 작고 마른 초등학생, 엄마가 바빠 꾀죄죄한 차림의 아이. 공부도 그닥, 인기도 그 닥이었던 아이. 


 지금은 2020년, 밀레니얼 세대란 단어가 등장하기 시작하고 Y2K는 사람들의 기억 저편으로 넘어간 올해, 나는 31살이다. 취직준비를 하며, 글도 쓰고, 데이트도 한다. 여전히 말랐지 만, 빼입는 것에는 자신이 있다. 고등학교 때 갑자기 커버린 큰 키와 공부를 꽤나 잘한, 여자들 꽤나 울렸던. 2020년의 나다. 


 며칠 전, 해방촌 피자집에서 여자친구와 피자를 먹다가 '세기말'의 내가 떠올랐다. 내 앞 에 있는 여자친구는 최근 내가 좋아하는 단발 헤어스타일로 큰 맘 먹고 머리를 잘랐다. 꽤 나 동안인 그녀가 그 날 특히나 더 세련된 차림을 하고 나와서인지 나는 아직도 금발인 내 가 '어른'이 된 것 같이만 느껴졌다. 세기말의 소년인 내가 상상하는 어른의 모습은 이런 것이었을까. 그보다 조금은 더 행복한 그림이 아닌가 싶다. 


 어렸을 때부터 내 꿈은 "가정을 이루는 것" 이었다. 바쁘신 부모님의 영향이 컸던 모양인 지 모르겠다. 여자친구를 사귀면, 항상 그 사람과의 미래를 이야기한다. 솔직히 말하건데, 너무 많은 사람에게 이루어지지 않을 약속을 했다. 하긴, 그 땐 몰랐지. 난 언제나 진심이 었다. 


 20대가 되어서는 31살, 지금의 내 나이엔 이미 결혼해 있을 줄 알았다. 자식과 같이 캐치 볼을 하는 모습을 상상했는데... 어린 시절 좋아한 드라마 파리의 연인이 떠오른다. 신데렐 라 스토리를 겪거나 바라는 것은 아니지만, 그냥 어른들의 연애가 저런 것인가보다. 하던 생각을 한 드라마였다. 상상을 했다. 나도 어른이 되어서, 사랑하는 사람과 백년가약을. 


 내 앞에 피자를 오물오물 먹는 내 여자친구는 어릴 적 내상상의 범위를 넘어설 만큼 예쁘다. 우리의 일상은 세기말, 세기 초 만큼이나 기대감에 부풀어있다. 내가 그렸던, 어른의 삶. 순간, 취직도 못한 나이지만 어느 정도 성취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느낌. 평생을 같이 하고 싶은 마음. 그것이 내가 바라던 모든 것이었다. 


 꼬마 최민성은 그놈의 세기말이 대체 뭐 어쩌라는 건지 언제나 궁금했다. 하지만 이제 내 가 아마 더 이상 세기말을 경험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생각을 하니 퍽 섭섭해진다. 일기도 쓰고, 사진도 많이 찍어둘걸. 친구들과 잘 지내고, 울지 않아 산타할아버지의 세기말 선물 도 받아둘걸. 있을 때 잘할 걸. 


 그렇게 생각하니, 나는 내 나름의 세기말을 많이도 겪었다 싶은 것이다. 워낙 축배를 좋아 하는 나지만, 더욱 더 축배를 들었어야했다. 한 시대의 종말, 나는 몇 차례 기억나는 순간 들이 있다. 다시 경험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 하니 섭섭해지는 많은 순간들. 가슴 시린 첫사 랑이니 아픈 사랑의 기억이니 하는 뻔한 소리를 하고 싶지는 않지만, 내가 말했듯이 사랑하 는 사람이 있다는 느낌. 평생을 같이 하고 싶은 마음. 그것은 내가 바라던 모든 것이었다. 


 사랑했던 사람, 의미 없어진 약속, 흔한 결말. 26살 무렵 왕십리 역사에서 이별을 통보받았을 때, 내 한 시대, 한 세기가 끝났다. 그 후 정말 많이 생각했다. 더 많이 사랑할 걸. 


 그 후 얼마나 많은 세월을 후회의 눈물로 지새웠던가. 얼마나 시간을 돌리고 싶던가. 그녀  뿐만 아니라, 내 몇 개의 세기들. 돌이킬 수 없는. 세상엔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너무나 많다. 내가 놓쳤던, 놓았던 적지 않은 사람들. 잊었던, 잊지 못하는 수많은 사건 사고들. 원하던 원하지 않던 결국 일어날 일은 일어나고 지나갈 일은 지나간다. 잊고 싶은 것들만 기억하는 내 머리는 머릿속의 서랍을 자꾸 여닫기만 하고, 돌이키지 못하는 일들을 곱씹으며 아파한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끝난 일은 끝났고, 되돌릴 수 없다. 내가 시간을 되돌리는 능력을, 전세기로 돌아갈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소용없다. 하지만 나는 참 많이도 곱씹어왔더랬다. 돌이킬 수 없는 일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 돌이킬 수만 있다면 하고 떠올리는 것, 돌이켜 봤자 달라지는 것은 없다는 것. 알면서도, 놓지 못했다. 그렇게 많은 세기말을 보내고, 동이 트기 전 세기초를 보내왔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그 시대는 끝났어야만 하는 시대였다. 아름답고 소중하지만, 모든 이 야기에는 끝이 있듯이 나중에 전해질 '이야기'일 뿐이었다. 그 세기말을 겪고 나는 세기초 를 방황했다. 하지만, 30살 무렵 왕십리 역사에서 새로운 시대를 써내려갈 줄은 몰랐다. 같 은 장소에서, 다른 시대를 살고 있다. 지금 사랑하는 사람, 내 여자친구를 만나기 위해서는 끝나야할 세기였다.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마음에 위안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 때, 25살의 나는 진심이었다. 31살의 내가 이런 생각을 한다고 미리 알았으면, 형의 면전에 대고 소리쳤을 것이다. 나는 진심이라고. 그녀를 사랑한다고. 너는 가짜라고. 나는 벙쪄진다. 이내 침착해져 나도 말한다. 나도 진심이다. 내 여자친구를 사랑한다. 하지 만 너 또한 진짜라고. 우리 모두 진짜라고. 두 시대의 나는 울며 부둥켜 안는다. 곧 어린 나는 사라지고, 내 앞에는 사랑스러운 여자친구가 오물오물 피자를 먹고 있다. 


 밀레니엄. 다들 세기말을 기념했다. 세기가 끝나가는데, 다들 슬퍼하기는커녕 기대감에 몸 서리친다. 어릴 때의 나는, 말했듯이, 어쩌라는 건가 싶었다. 하지만 지금 다시 돌아간다 면, 세기말을 뼈저리게 느끼고 싶다. 세기말을 기념하고 싶다. 마찬가지로, 과연 26살의 나 는, 그녀를 잡을 것인가. 잡지 않았던 것을 두고 많은 후회를 했더랬다. 내 세기말로 돌아간다면... 나는 무엇을 할까? 아마 그저, 기념하겠지. 지켜보겠지. 웃으며 보내줄 순 있겠지. 지금에라도 기념해본다. 한 풍요로웠던 시대를 기려본다. 북가좌동에서 밤을 지샜던 것 을 기억한다. 눈물로 지새울 필요가 없는 것이다.


 나는 더 이상 그녀가 그립지 않다. 나에게는 너무나 사랑스럽고, 사랑하는 여자친구가 있다. '세기말'이란 주제를 듣고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 할 때, 자연스럽게 나에게 물은 "나의 세기말이 무엇일까?"라는 질문에 그녀가 돌연 튀어나왔을 뿐이다. 그녀는 내 한 시대였다. 그리고 세기말을 맞이했고, 정말 끝나버렸다. 하지만, 세기말이 있으면 세기초가 있는 법. 나는 다시 사랑을 시작했다. 나는 더 멋져졌고, 원숙하다. 과거의 시대 덕분이다. 내 여자 친구에게 나를 선물할 수 있어서 좋다. 


 우리는 20세기만을 보냈지만, 나의 세기말은 꽤나 여럿이다. 내게 적지 않은 시대가 있어 서 좋다. 나는 여러 시대를 거쳐 많은 것을 겪고, 성장했다. 그래서 지금의 시대가 더 소중 한 것을 안다. 그래서 더 달콤한 사랑을 전해줄 수 있다. 내 시대들에 관해 이야기를 전할 수는 없지만, 내 시대들은 나를 만들었다. 나를 안다면, 내 시대를 안다면 모두들 기념했을 것이다. 


 기념하지 않을만하다고 생각했던, 내 짧은 연애와 해프닝들도 기념하는 마음이다. 세기말이 끝난 후 나는 방황을 하며 다시 새로운 세기를 찾으려 부단히도 노력했지만, 사람들의 마음을, 내 마음을 다치게 하는 것 이상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지금은 기억도 못하는 이름들과 얼굴들, 그 사람들도 나에겐 세월이었다. 잊어선 안되고, 기념해야만 하는 짧은 세기였다.


 이제 내가 더 이상 세기말을 겪지 않아도 될 것이란, 그녀를 잃지 않아도 될 것이란 생각에 나는 충만해진다. 물론, 모든 것은 나의 노력 여하에 달렸다. 나는 다짐한다. 그녀에게 사랑 을 줄 것이라고, 놓치지 않을 것이라고, 영원히 함께 할 것이라고. 우리는 이야기가 아닌 것이다. 그녀와의 관계는 시간에 의해 정의되지 않을 것이다. 한 세기가 시작되면, 100년 후 그 세기가 끝난다. 여자친구와 백년해로를 맹세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마치 산타할아버지의 선물을 받겠다는 것과 같다. “울면 안돼“, “착하게 굴어야해.“ 울어도 되지만, 아마 울겠지만, 나 나름대로의 결의를 다지는 것이다.


 무슨 생각을 그리 골몰히 하냐는 여자친구의 말에, 나는 정말 많이 사랑한다 말한다. 지금의 시대가 내가 겪었던 어떤 시대보다 행복하고, 영원하길 바란다 말한다. 끝나지 않을 것이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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