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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페나메나 Nov 30. 2020

출사표

 꿈을 꿨어. 이틀간 꿈을 꿨어. 나는 야구 선수인거야. 그것도 은퇴 경기를 앞둔 야구 선수. 특출난 선수는 아니었지만 한 팀에서 헌신한 끝에 나름 레전드란 칭호를 얻게 되었지. 통산 3할? 택도 안됐어. 전성기에는 괜찮은 진루타를 치는 2번타자, 전반기와 후반기에는 출루하면 고마운 9번타자였지. 우승 한번 해봤지만, 데뷔 시절의 일이라 그렇게 감이 오지도 않았어. 우승을, 우승을, 나는 아무 것도 못해도 좋으니, 다시 한번 우승을이라고 생각한 것도 서른 살 중반 때지. 왜 그렇게 소중함을 몰랐을까. 


 시즌 마지막 경기 팀이 나를 위해 마련해준 자리는 소박했지만 감동적이었지. 나를  나대로 느끼게 해준 그들은 나를 마지막 경기의 선발 2번타자로 출전시켰어. 한 타석을 소화 후 나갈 예정이었지. 최상의 시나리오는, 번트였어. 1번 타자가 출루를 하면 내가 전매특허 3루 앞 보내기 번트를 치고, 투수는 안정적으로 1루로 공을 던져 나를 아웃시키는... 내가 그리던 그림이었어. 은퇴 경기가 확정된 1년 전부터 말이야. 1번 타자... 1번 타자의 출루... 그것만 바랬어. 우리팀 붙박이 발빠른 선두타자는 그 시기에 계속 컨디션이 안좋았지. 감독님과 상의 후 1번타자를 한시적으로 바꿀까했지만, 5강 싸움이 한창이라 나도 팀에 방해가 되고싶지는 않았지. 1번 타자가 나랑 친한 후배였기도 하고말이야. 1번 타자의 출루... 그것만 바랬어. 


 경기는 시작됐어. 1번타자의 초구 헛스윙이 기가 막혔지. 담장을 넘기려는 줄 알았다니까. 몸쪽 완전히 높은 하이패스트볼이라기도 뭐한 실투를 스윙한거야. 당장이라도 나가서 멱살을 잡고 싶었지만 그놈의 눈은 진심이었어. 그 후, 네차례의 연속된 볼, 볼넷, 출루. 기쁘지만 씁쓸하기도 했어. 상대팀 투수 놈도 소문을 들었는지 출루를 시켜주려는 것 같았어. 어쨌든, 나간다. 3루 앞 보내기 번트. 대고 만다. 기필코 대고 만다. 그 때 잠에서 깼어. 하루를 시작했지.


 난 그래서 참 싱거운 꿈이 다있네 했지 뭐야. 전혀 몰랐지. 예상조차 할 수 없었지. 다음날 취해서 잠에 들었을 때, 나는 어제의 상황에서 배트를 들고 타석으로 걸어들어가고 있었어.


 초구, 151km의 바깥쪽 낮은 직구. 나는 이놈이 나를 삼진 잡으려는 것을 알게 되었어. 빌어먹을 새끼! 번트는 보기 좋게 파울이 되었고, 두번째 공이 내 등뒤에서 몸쪽으로 파고들었지. 슬라이더였어. 노 볼, 투 스트라이크. 나는 짧게 쥔 배트를 제대로 잡았지. 은퇴 마지막 타석에서 쓰리 번트는 댈 수 없잖아? 간다. 친다. 우중간을 가르는 적시타. 치고 만다. 볼 하나를 골랐어. 원 볼, 투 스트라이크. 볼일까? 상황에 맞게 대처할 수 밖에 없었어.


셋포지션

피칭


번뜩!


 일어나보니 나는 선수 휴게실이었지. 가벼운 뇌진탕을 일으키고 병원에 후송되어 엑스레이를 찍을 예정이라고 했어. 나는 실려가는 와중에 깨어난거야. 나는 몸에 맞는 볼을 기록한거야. 내 은퇴 경기는 그렇게 몸에 맞는 공으로 끝났어. 그 투수는 직구 헤드샷으로 퇴장당해서, 내 엠뷸런스를 배웅하려고 기다리고있었지. 나는 몸을 일으켜 덕아웃으로 뛰어갔어. 8회, 무사, 1번타자의 출루. 2번 타자. 내 타석이었어. 감독님에게 달려가 준비 됐다 말했지.


 "미안하다, 너가 쓰러져서 교체할 수밖에 없었다. 어쩔 방도가 없었다. 나도 참 아쉽구나."

 

"이 개자식아!"

 

 난 존경하던 감독님에게 주먹을 날렸고 더그아웃은 아수라장이 되었어. 뜯어 말린 나는 진정이 된 척을 하다가, 배트를 잡고 뛰어나갔어. 번트를 댈게요. 3루 앞 멋진, 절묘한 희생 번트를 댈게요.


 심판들이 나를 만류했어. 너 마음 안다며. 요원까지 뛰어나와 나는 제지당했고. 나는 무릎을 꿇었어. 그리고 빌었지. 한 타석만, 나에게 한 타석만... 신에게 빌었어. 빌고 빌었지만, 나는 결국 그라운드에서 쫓겨났지.


"감사했습니다!"


 마지막 인터뷰를 마쳤어. 난동을 부렸지만, 관계자들과 팬들은 이해가 가는 모양이더라고. 나는 그렇게 인터뷰까지 하고 어이없는 은퇴 경기를 마쳤어. 


 숙소로 돌아가는 버스에서 나는 읊조렸지. 


"한 타석만, 나에게 한 타석만..."


 그 때 내가 깬거야. 시계는 6시 30분. 첫 출근을 준비해야했지. 어렵게 얻은 직장 멋지게 다녀보고 싶어서 허둥지둥 샤워도 하고 새로 산 정장을 입고 머리도 다듬었지. 버스를 타고 빌딩 앞에 도착했을 때, 갑자기 눈물이 나더라. 타석에 들어선거야. 그리고 앞으로, 나에겐 수천 수만번의 타석이 있을꺼야. 오늘 머리에 속구를 하나 맞아도, 일어나 내일 뛰면 되는거야. 그렇게 나의 직장 생활은 시작되었어. 뛰어난 능력을 못보일지도, 성과도 못이룰지도 몰라. 그렇지만, 레전드가 될거야. 이미 한번 해봤잖아. 


 "오늘은 내 첫 타석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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