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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선미 Jan 09. 2024

친정엄마처럼 살기 싫었는데

나도 엄마가 되니 별수 없구나

겨울방학을 맞아 겨울잠을 자는 아이들은 긴긴밤을 자고 일어나면 고무줄처럼 아니 콩나물처럼 쭉쭉 늘어나있었다.

작년에 사준 바지가 눈에 띄게 짤막해졌고, 소매는 칠부처럼 작아져 있었다. 옷이 건조기 때문에 줄은 건지 애들이 자란 건지 누구의 잘못인지 모르겠다. 더 웃긴 일은 거울을 수시로 보던 아들이 팔을 들어 올릴 때마다 배꼽이 나온다며 옷 투정을 부렸다. 생전가도 옷타박을 하지 않던 아들이 심통 부리니 미안해졌다. 학원비 못지않게 의복비도 무시할 수 없는데 어디서 물려 입을 수 없는 게 속상했다.


티셔츠와 바지를 사준 지 6개월이 채 지나지 않았는데 옷이 몽땅 작아진 것이다. 너무 딱 맞는 옷을 샀던 것도 아닌데 난감했다. 아이가 잘 자라고 있다는 증거인데 어딘지 모르게 재정이 위태로워졌다.


자식 가진 엄마의 욕심은 끝이 없다는 말이 틀린 말이 아니었다.  키도 남들만큼은 컸으면 좋겠고, 공부도 남들만큼 잘하면 좋겠다고 생각이 무의식 속에 존재했다. 유난스럽게 사교육을 하지 않아도 머리가 좋아서 보통 이상으로 잘하길 바라는 것은 엄마 욕심이었다.


다들 우스갯소리로 '엄마의 욕심은 끝이 없다'라고 얼굴도 미남이라 인기도 좋았으면 좋겠다며 혼자만의 상상에 빠졌다. 고슴도치도 제자식은 예쁘다는 말이 왜 나왔는지, 내 새끼를 키우면서야 깨달았다. 어떤 날은 아이얼굴에서 남편의 모습이 나타나기도 하고, 내 얼굴이 나타나는 것을 보며 뿌듯할 때도 있었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고 내 새끼들은 자세히 보니 좋은 점만 보였다.


남편과 종종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아이들이 나의 좋은 점과 당신의 좋은 점만 쏙 빼가서 닮았다면 얼마나 좋을까며 호들갑을 떨어보지만 아이들은 우리의 모난 점만 가져가서 어찌나 속상했는지 서로 털어놓았다. 새끼발톱이 두 개인거랑 여드름 피부라서 온몸에 여드름이 많이 나는 게 속상하다며 토로했다. 아이들은 매일매일  변화하며 맛있는 고기를 먹이는 만큼 콩나물처럼 쭉쭉 늘어났다. 분명 유전의 힘으로 어디까지 닮을지는 모르지만 유전보다는 의학의 힘을 빌어서 키를 키울 수 있는 기똥차게 좋은 세상은 분명했다. 아무튼 부모의 심정이란 우리보다는 좀 더 키도 크고 멋지게 자라길 바랄 뿐이었다.





얼마 전 외출을 하는데 아들은 바지도 짧아졌고, 티셔츠는 더 짧아졌다며 입을 옷이 없다고 투정 부렸다.

교복대신 체육복만 입어서 알 수 없다가 방학이라 사복을 입어야 해서  더 옷이 궁색 맞았다.

당장 입고 나갈 옷이 없다며 작아진 옷은 불편하다고 징징거렸다. 그 좋은 외투도 사준지 몇 개월이 되지도 않았는데 작아졌다니 속으로 안타까울 뿐이었다. 작아진 옷을 남편이 입기엔 작고, 내가 입기엔 크고, 동네 아울렛에서 샀어도 브랜드라 비싼 돈을 주고 샀거늘 그냥 버릴 수 없는 노릇이었다.


예전에 엄마가 왜 오빠들 옷을 입고, 아빠의 메리야스와 티셔츠를 입었는지 이제야 이해가 됐다. 왜 엄마옷을 놔두고 남의 옷을 입는지 그때는 이해하려 하지도 않았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목욕탕에 가면 가끔 엄마가 창피할 때가 있었다. 다른 아줌마들처럼 예쁜 레이스 달린 러닝이 아닌 딱 봐도 남자속옷이라는 게 어린 눈에도 보였다. 엄마가 아까워서 그 옷을 입는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 엄마에 그 딸이라고 친정엄마처럼 살기 싫었는데 내가 그랬다. 나도 별수 없이 엄마처럼 아까워서 작아진 아들 운동복과 후드티를 내 옷장에 고이 모셔둔 이유였다. 남편은 입을 옷이 그렇게 없냐고 펄쩍 뛰었지만 내 옷보다 더 좋은 아들 옷을 버릴 수 없어서 입겠다는 마음이었다. 아마 남자는 이해 못 할 구두쇠인가, 아니면 모성애인가. 딸 옷도 내게는 마찬가지였다. 얼마 전 모임에 니트 조끼를 입고 갔는데 한 선배가 조끼가 참 예쁘다고 했다. 아마도 예쁠 것이다. 초등 딸이 사놓고 딱 한 번만 입었던 조끼니까 말이다.


내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어찌하다 보니 스타일 구분하지 않고 아이들 옷만 입는 엄마가 되어버렸다. 옛날에는 가난해서 그렇다 쳐도 지금은 내 옷을 입을 형편이 되는데도 왜 궁상맞게 그러는지 엄마가 되고 나서야 알았다. 오늘 점심에 만난 언니가 그랬다. 내가 작년에 운동하면서 찍어두었던 사진을 보는데 내 옷 입고 찍은 사진보다는 아들의 작아진 옷 입고 찍은 사진이 더 많아서 어딘지 모르게 씁쓸했다는 말에 나도 모르게 고개가 끄덕여졌다.  


왜 엄마들이 옷장에 옷을 빈틈없이 빼곡하게 걸어두고 친구 만나러 외출할 때 입고 나갈 옷이 없다고 하는지 이제야 공감할 수 있었다.


엊그제 아기를 낳아 솜털처럼 보드랍고 맨질맨질하던 피부에 어느덧 울긋불긋 꽃이 피더니 급격하게 성장하는 아이들이 내 옆에 듬직하게 나를 지켰다. 아기라고 하기엔 너무 훌쩍 커버린 아이들, 내 키와 몸무게보다 훨씬 자란 아이들이 대견하다가도 세월이 갈수록 엄마들은 어딘지 모르게 추해 보이는 모습은 다 이유가 있었다.


옛 어른들은 금방 출산한 엄마들에게 빈 쭉정이라고 표현했는지 이제야 그 이유를 알았다. 다시는 친정엄마처럼 살기 싫다고 말했는데 어느새 엄마랑 똑같이 살고 있었다.



사진출처 : 언플래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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