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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선미 Jan 26. 2024

인생, 예술(윤혜정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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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원문장

 - 인생, 예술(윤혜정 작가)

어느 날 저녁을 먹던 딸이 말했다. “나는 결혼을 안 할까 해.” 대체 무슨 소리인가? 

“엄마를 보니, 아이를 낳아 키우면서 자기 일을 한다는 게 너무 힘들고 고단한 것 같아. 

난 자신 없어.” 내가 얼마나 데친 시금치처럼 굴었길래 저러나 싶은 죄책감과, 자식들에게 마냥 행복한 모습을 보이려 애쓰는 것도 일종의 강박이지 않나 하는 자기변명이 그 짧은 시간에 뒤엉켜 말문이 막혔다. 

그나마 긍정적인 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그 문제를 인식하는 것이 먼저라는 것이고, 적어도 딸은 작금의 상태를 공고히 하는 데 일조하고 있는 엄마라는 인간의 상태를 파악해 내게 알려준 셈이다. 그러니 내가 할 일은 내 딸의 아이를 지금 나의 친정 엄마처럼 봐주는 것이 아니라 현명한 답을 낼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데 기여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모르긴 해도 마욜리노 역시 세 여자가 입에 물고 있는 실을 끊어 내야 할지, 더 튼튼한 실을 물어야 할지의 문제를 두고 평생 고민해 오지 않았을까.

 「Ⅳ. 여성/ 안나 마리아 마욜리노

 오늘을 사는 윤혜정의 ‘삼대’」







젊은 시절에 엄격한 가부장제와 혹독한 시집살이를 모두 겪은 우리 엄마 세대는 할머니가 되어 다시 '딸집살이'를 해야 하는 운명에 처해 있다. 내가 아닌 나의 엄마가 변화의 직격탄을 고스란히 맞은 셈이다. 여성들의 역사는 예전과 달리 일부 전진한 것처럼 보이지만 후퇴한 면도 분명 있다. 현대 여성들은 전보다 사회에 참여하면서 더 많은 짐을 지고 있다. 일과 가정에서 맡은 바 책임이 있기 때문에 스트레스도 많이 받고 있다. 

엄마 세대와는 달리 나는 배울 만큼 배우고 일도 곧잘 해내던 나였는데 결혼하면서 사회와 가정 모두에서 이중 부담을 지는 상황에 놓여있다. 특히 여자가 사회생활과 육아를 병행하지 못하기 때문에 친정에 육아를 맡기는 일이 늘었고,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본가 위주가  아닌 외가 위주로 재편성되고 있다는 것을 서로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입장에 처했다. 



<사진 설명> 언제 끊어질지 모르고 자칫 놓칠 수도 있는 실을 입에 물고 있다는 것은 부박한 삶을 지켜 온 충만한 사랑과 절박한 연대감은 물론 그 반대편에서 도사리는 삶의 취약성과 일시성, 그리고 운명의 굴레를 암시하기도 한다.








오늘을 사는 윤혜정의 '삼대'에 나오는 문장이다. 

할머니, 나(엄마), 딸. 누군가의 딸이고, 누군가의 딸이었으며, 누군가의 딸을 키우고 있거나, 누군가의 딸을 낳을지도 모른다는 절대적인 공통점을 공유한 여자들 혹은 '두 명의 엄마'와 '세 명의 딸'이다. 

여자라는 이유로 공통점이 참 많다. 출산, 육아, 엄마, 딸이라는 물리적으로, 은유적으로 연결된 태생적인 정체성의 문제를 공유한다는 점에서 아빠와 아들과는 다르다. 

이 세 여자는 각기 다른 성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해야 한다.  엄마와 딸 사이의 관계지만 다른 근본적인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인정하고 다름에도 동질감을 느낄 수 있고 굳이 결의하지 않아도 같은 방향을 볼 수 있다. 육아라는 명백한 목적에서 시작한 연대인 동시에 목적이 끝났다고 결코 쉽게 끝낼 수 없는 매우 강력한 연대다.   



육아와 일의 부담을 모두 끌어안은 여자들이 사회생활에 매진할 수 있도록 그 무게 중심을 나눠 갖는 것이 아닌 '어머니의 상태'를 존중하는 것, 그것이 알랭 드 보통이 정의한 진정한 신(新)  모계사회다.

세계여성경제포럼에서 알랭드 보통이 '새로운 모계사회'를 주제로 연설을 했는데 작금의 모계사회에 대한 타당성의 근거나 혁명적인 변화를 수용하고 대처하는 법이라든가, 고단한 워킹맘을 위로할 주옥같은 문장을 말했다. 

현대사회에서는 일의 대부분이 돈에 의해 평가된다. 육아는 경제적 가치와 무관해 저평가되고, 전문직이나 대기업에 다니는 사람에게 존중을 표한다. 나처럼 육아를 위해 회사를 그만두고 아이를 돌보는 사람을 아랫사람처럼 내려보고, 때론 투명인간처럼 취급한다는 것을 모른다. 심지어 돈을 벌지 않는다는 사실을 못 견뎌하고 창피해한다.



'피아(彼我) 간에 구분이 안 되는 전쟁터에 있는 사람'처럼 각별하지만 그래서 더 끔찍할 수도 있고, 애틋하지만 그래서 더 지긋지긋할 수도 있으며, 대부분의 경우에는 이 모두의 경계를 들락날락한다.


전쟁터에서는 정말 누가 내편인지 저편인지 구분할 수 없다.  지구별에 처음 나온 소풍도 마찬가지다. 가족이라는 울타리는 서로 애틋하면서도 때론 지긋지긋해지기도 하고 얼굴을 붉히며 눈을 희번뜩거리며 싸우기도 한다.  살아가는 모든 생명체는 이 모두의 경계를 들락날락거리며 하루를 채워가고 인생을 살아간다.





일과 육아를 양립할 수 없는 직장맘들은 외할머니에게 전담할 수밖에 없다. 그러기에 남편도 어쩔 수 없이 본가보다는 외가에서 육아를 공유하며 관념적인 가족사가 재정의되고 있다.

미국의 전 대통령인 오바마가 딸의 공연을 가느라 정치 모임에 참석하지 못했다는 뉴스를 보면서 우리나라의 가정을 떠올렸다. 이제야 조금씩 공동육아하며 변해가는 가정이 늘어나고 있어서 다행이다. 여자 혼자서 독박육아를 하는 시대는 사라져 가고 있다.

마욜리노의 작품에서 세 여자가 입에 물고 있는 실이 떠올랐다. 실을 끊어내야 할지, 더 튼튼한 실을 물어야 할지 평생 고민해 오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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