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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선미 Feb 01. 2024

치매엄마는 공부 중



출처 Unsplash



어려서부터 엄마가 내게 가장 강요했던 일은 무엇인지 떠올려보았다. 내 아이를 낳아 키우며 부쩍 엄마라면 어떻게 했겠느냐는 의문을 품으며 비로소 엄마의 심정을 이해하기에 이르렀다. 진즉 깨달았다면 엄마에게 반항도 안 하고 착한 딸이 되었을까 싶다.



엄마도 분명 엄마가 처음이라 모든 게 서투르고 좋은 부모가 되기 위해 최선을 다했을 거로 생각다.


모든 부모가 그렇듯 자식 일이라면 불의를 참지 못하고 나섰을 거라 믿다. 자신 목숨보다 귀한 자식을 위해 목숨까지 바칠 수도 있다.  



엄마도 나처럼 좋은 부모가 되기 위해 부단히 애쓰고 노력했을 테고 결과가 어찌 됐든 잘 키워 시집과 장가보냈으니 잘 키운 것이다. 어리석게도 부모가 되고 나서야 배울 수 있다니. 자식 걱정은 죽을 때까지 끝이 없다는 것을 깨달으니, 어딘지 모르게 씁쓸했다.



어린 시절의 엄마는  늘 내 뒤를  따라다니며 꼬치꼬치 잔소리하셨다.  그 사소한 말들은 마치 집안의 법처럼 들렸고, 사 남매의 막내였던 나는 살아남기 위해 칭찬과 인정을 받아야 했다. 그중에서 머릿속에 아직도 선명하게 자리 잡은 것들이 떠올랐다.



엄마가 강조했던  약속



- 거짓말하지 말기

- 인사 잘하기

- 편식하지 않기

-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기

- 숙제 먼저 하고 놀기

- 돌아오는 시간 말하고 나가기



엄마에게 수백 번은 들었기에서 저절로 온몸에  스며들어 습관이 되었다. 그렇게 몸에 밴 습관은 40년이 지난 이 시점에서 현대를 살아가는 데 있어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았다. 그때는 잔소리처럼 여겼고 분명 엄마는 팥쥐 엄마가 틀림없다며 몸부림치고 짜증 냈는데 지나고 나서야 감사한 습관이라는 것이라 뉘우쳤다.



엄마도 자랄 때 엄마의 엄마에게

내가 들었던 말을

똑같이 들으며 자랐겠지?




때로는 엄마도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번번이 해야 했던 엄마의 심정은 어땠을까?


호기심이 많았던 나는 가고 싶은 곳, 사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들이 많아 끊임없이 집요하게 졸랐었다.

어린 마음에 감히 엄마 사정까지 생각할 틈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다른 친구들은 가는데 왜 나는 안 되냐며 응석 부리며 엄마의 사정은 생각도 못 하고 떼를 썼다. 그래야만 약간의 반응이 돌아왔기 때문이다.


시골 형편이 모두 거기서 거기였는데도 엄마의 거짓말에 화가 나기도 했고 끝내 서운했다. 번번이 엄마는 '나중에, 다음에, 몇 밤 지나고 난 후에는 말을 자주 했다. 내가 엄마가 되고 나서 내 자식이 나에게 똑같은 것을 사달라고 조르는 상황에 맞닥뜨려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엄마가 했던 비법을 나도 써먹어야 하나?


'나중에, 다음에, 백 점 맞으면'이라고 협상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어리석게도 늦은 감이 있지만 엄마가 되고 나서야 엄마를 이해하다니 참 부질없다.




출처 Unsplash



엄마는 몇 년 전부터 아다. 긴 병에 효자 없다고 이제는 덤덤하게 느끼는 내 마음이 역겹다.


처음 응급실에 갔을 때는 숨넘어갈 듯 애가 탔는데 양치는 소년처럼 몇 번을 응급실행으로 불려 갔더니 이제는 놀랍지도 않다.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엄마임에도 그 사랑은 위대하나 절절함은 오래가지 않았다.

내 가정이 더 먼저였고 그런 자신은 이해해줄거라, 곧 엄마가 괜찮아질 거라는 믿음도 있었다.


엄마는 몇 년 전 치매 진단을 받았다. 여러 차례 전신마취의 후유증인지 뇌졸중의 후유증인지 몰라도 다른 또래 엄마들보다 점점 인지능력이 떨어지시고 세상만사를 귀찮아하다. 심지어 점차 자식 걱정만 하던 사람이 아이처럼 맛있는 거, 재미있는 것만 찾는다. 또다시 아이로 돌아간다는 말이 맞는 건가.


처음 치매 진단을 받을 때는 알츠하이머처럼 자기  자식도 기억 못 하고, 집도 기억 못 하게 될까 봐 온 가족들이 닥칠 상황에 미리 긴장했다. 엄마에게 손주가 열 명이나 있는데 할머니의 병명을 듣자마자 자꾸 자신의 이름을 할머니(엄마)에게 확인하기 시작했다.



"할머니, 저 누군지 알아요?"


"할머니, 뭐 드시고 싶은 게 있나요?"


"할머니, (손가락으로 숫자를 만들어) 이게 보여요. 몇 개예요?"



참 이상다. 엄마가 치매인데 문제를 낸다 한들 맞출 수가 있겠다며 손사래를 쳤지만 그게 우리들 모두 애타는 마음이었다. 영영 이별하기 싫어서 조금이라도 의식(정신) 이 있을 때를 기억시켜 주려고 애썼다.


모든 것을 귀찮아하는 엄마는 갑작스럽게 폭풍같이 쏟아지는 테스트에 '몰라, 몰라, 몰라'를 연거푸 말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말이 채 끝맺기도 전에 '기억 안 난다'라는 말을 연신 반복했다. 아이들은 할머니가 진짜 치매로 기억을 못 하는지 아니면 귀찮아서 그러는지 판단할 수 없었다. 그저 두 눈에 눈물을 글썽이며 '할머니, 저 잊어버리면 안 돼요.'라며 눈물을 훔치기 바빴다.


지금도 엄마는 치매 진행을 늦추는 약과 운동기구를 보건소에서 제공받아 열심히 하고 있지만 노치원(노인주간보호센터)에 다니시면서 훨씬 쾌활해지셨고 심심하다고 말하던 횟수가 눈에 띄게 줄었다. 어찌 보면 자식만 바라보던 엄마가 이제야 자신을 위해 사는 거 같아 보기 좋다.



엄마도 어제와 같은 오늘을 열심히 살아내는 모습에 감사했다. 누구를 탓하지 않고 자신의 환경을 받아들이며 굴하지 않고 열심히 자신을 챙겨주는 곳에서 친구들과 어울리는 모습이 멋져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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