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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선미 Feb 24. 2024

엄마의 변신은 무죄


우리는 매일 보고, 듣고, 읽는 것에 따라 내 의지에 상관없이 마음이 요동친다.


세상에 못할 것이 없다는 의욕이 불타오르기도 하고, 당장 이룰 수 있는 목표에 시각화를 해보기도 한다. 환경이 왜 중요한지 알기에 임신하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클래식 음악을 듣는 일이었다.


생전 듣지도 않던 고용한 음악을 나와 다른 세상을 살기를 바라는 최소한의 바람이라며 있는 그대 태아에게 보여주고 들려주지 않고 무던히 애쓴다는 것을 아이들은 알아야 한다.


왜 아침에 긍정적인 글을 읽어야 하고, 동기부여되는 영상이나 마음이 고요함을 찾을 수 있는 아침 명상을 해야 하는지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긍정 마음가짐, 태도의 변화가 아침마다 리셋되어 하루를 살아내는 에너지가 되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로 돌아가서 사 남매가 등교하는 아침을 떠올렸다. 총칼만 안 들었지 전쟁터라 해도 과언이 아니듯 초를 다투고 서로 간에 고성이 오갔다. 끼어들었다고 일러바치기도 하고, 동생이 형한테 대든다고 이마에 알밤을 맞기도 했다.



왜 그렇게 오빠 둘은 싸웠는지 언니와 나는 남자의 세계에는 알 수도 없지만, 관심도 없었다. 평일에는 첫 차를 타야 하는 언니, 오빠 때문에 줄 서서 세수를 하려 해도 뒤로 밀릴 수밖에 없었다. 예나 지금이나 서열에 대한 설움은 대물림되는지 그대로라는 사실이다. 우리 애들을 보면 말이다.


첫째를, 아들을 챙기는 게 아니었음에도 그 당시에는 막내라는 이유로 모든 우선순위에서 맨날 꼴찌라서 서러운 일이 많았다. 막내라서 당찼는지 '왜 나를 첫째로 낳아주지 않았냐'라며 당돌한 말을 참 많이 했었다.



(나중에야 알았다.

첫째가 받았던 유익한 혜택들이

나중에는 책임감으로

어깨를 지긋이 무겁게 누르고 있다는 것을)










수십 년의 세월이 지나고 어른이 되고 나서야 알았다. 첫째는 첫째 나름의 책임감과 무게감을 안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막내인 나는 뭐든지 용서됐고, 막내라서, 어리니까 봐주는 일이 많다는 것을.


이 시절의 어른들(엄마, 아빠)은 남녀가 평등한 시대가 아니었다.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고 주눅 들어 사는 엄마들이 많았다. 남자는 하늘로 우러러보던 시대를 엄마는 살았다.


그 시대를 살고 있지 않지만 어린 시절에 보고 자랐기에 아침이면 아이들 등교시키느라 초를 다투고 온 집안을 뛰어다니는 일은 기본이었다. 그럼에도 동시대를 살았던 남편은 자기 경험상 아이들에게 큰 소리치 말고, 아침부터 잔소리로 아이들 기분 상하지 하지 말게 하라며, 도로 내게 얼굴을 붉히며 화를 냈고 아이들을 감쌌다.


(자신도 어린 시절에 엄마한테 야단맞는 게 싫었다고 한다)



졸지에 엄마라는 존재는 세상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소중하고 사랑한다고 말한다. 또한 반대로 거짓말을 가장 잘하는 나쁜 엄마로 전락하는 순간 어이없어서 말이 막히고 한숨밖에 안 나왔다.


나는 이미 좋은 엄마가 되기는 글렀고 나쁜 엄마 역할이 더 편하긴 했다.



아침 일찍 깨워서 등교시키느라 소리 지르는 일도 엄마 몫이니까 말이다. 학교 가방 챙기는 일, 준비물을 미리 챙기는 일이 전날 저녁이면 좋으련만 아이는 학교 가기 직전에 말하기 일쑤였다.



엄마라서 분통을 터트리며 챙겨주느라 바쁜데 아이는 오히려 태연한 게 문제였다. 다시는 안 챙겨주겠다고 협박을 하면서도 내 의지와 상관없이 손과 발은 문구류를 챙겨주러 서랍장을 뒤지고 있었고, 노트북을 켜서 프린트를 하고 있었다. 엄마는 예나 지금이나 만능이어야 하니까. 타고난 만능은 아니지만  나약했더라도 엄마가 되면서 만능 슈퍼우먼이 된다.




나는 일찍이 초등 저학년 때까지만 가방을 챙겨주다가 곧 그만두었다. 너무 의지하는 게 보였고 오히려 엄마 탓을 했기에 이건 아니다 싶었다. 평생 내가 가방 싸주지 않을 바에는 대책이 시급했다.


지나영 교수의 <본질 육아>에서처럼 자주적이고 독립적인 아이들로 키우겠다고 마음먹었다면 하루라도 빨리 홀로 서게 해야 하는 것이 해결책이었다.

준비물 못 챙겨가서 혼나는 것도 아이 몫이고, 시간표를 보고 가방을 싸는 것도 아이 몫이다.

엄마가 내 자식 자존감 무너질까 감싼다는 핑계로 대신해 준다면 그만큼 아이는 뒤늦게 성장한다.

과연 언제까지 대신해 줄 수 있을까?




엄마의 변신은 무죄다.


엄마가 하는 선택은 모두 너희를 위해서 하는 일들이다. 훈육하는 것도, 밀당하는 것도, 협박하는 것도 엄마조차 하는 말들이 아니라 너희에게 보탬이 되고자 하는 말들이다.  논어에 나오는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고 넘치는 것보다 조금 모자란 것이 낫다는 말로 모자라는 것은 채워서 보충할 수 있지만 넘치는 것은 주워 담을 수도 없고 통제불능의 상태에 빠질 수도 있다.






사진 출처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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