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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선미 Mar 08. 2024

남편에게 갱년기가 왔다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소주를 찾았나

남편 애주가는 아니다. 그렇다고 술을 아예 입에 대지 않는 것도 아니다. 분위기에 따라 마시는 정도였다.

코로나를 겪으면서 남편의 일상은 바른생활 사나이가 됐다. 잦은 술자리가 거의 사라졌다. 늦은 시간에 귀가하는 일도 드물어져서 예전과 달라져서 불안했던  마음을 잠재울 수 있었다. 왜냐하면 술 마시면 대리운전을 하여 늦은 시간까지 몇 차를 걸치고 돌아오면 그다음 날 출근하는데 지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업하는 남편이기에 턱까지 차오르는 잔소리를 간신히 꾹꾹 눌러 삭히는 편이었다.


전 세계를 두려움에 떨게 했던 코로나가 사라지고 마스크 없이 자유롭게 돌아다녀도 남편은 예전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동안 술 마실 친구가 없어진 건지 아니면 나이 탓으로 관심사가 바뀐 건지 몰라도 매일 집밥을 차려줘다. 아이들과 간단하게 먹으면 되었던 저녁상차림에 대한 부담이 커졌다. 아이가 학교에서 땡 하고 종 치면 돌아오듯 남편은 퇴근 후 6시를 칼같이 지키고 집으로 돌아왔다. 시계추처럼 왔다 갔다 하는 똑같은 일상이 지겨워 보인다고 물었지만 본인은 아무렇지 않다며 대꾸도 하지 않고 새겨듣지도 않았다. 남자들에게도 갱년기가 있다는 말이 떠올랐다.


아이들은 학년이 올라갈수록 학원을 마치고 귀가하는 시간이 늦어졌다. 그 때문인지 저녁을 먹는 시간도 자연스레 늦어졌다. 칼같이 시간을 잘 지켜서 삼시 세끼를 먹던 남편은 저녁 먹기 전까지 자꾸 냉장고를 뒤지며 주전부리를 찾았다. 그러면서 아무것도 먹을 게 없다며 괜히 짜증을 내더니 마트에서 과자를 한가득 담아왔다. 배고프니까 먼저 저녁을 먹고 차려주겠다고 했지만 극구 사양했다. 자신은 전혀 배고프지 않다며 공부하고 늦게 오는 아이가 먼저지, 혼자 식탁에서 밥 먹는 게 안쓰럽다며 기어코 말려서 늦은 저녁을 기다렸다가  다 함께 먹었다.


문제는 늦은 저녁을 먹을 때 냉장고에서 소주를 꺼내서 먹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심지어는 소주 안주와 어울리지 않는 메뉴에는 자기가 먹을 안주를 손수 만들기 시작했다. 결혼 20년이 지나니 자꾸 남편이 내 주방을 침범다. 가만히 침범하면 그냥 지나칠 수도 있는데 자꾸 뭐라 뭐라 잔소리를 하니까 거슬리고  불편다. 주부로서 터줏대감노릇을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주방에서 큰소리 내는 곳이거늘 그것도 남편에게 빼앗겼다.

집에서 가장 오랜 시간을 머물렀던 곳, 나만의 퀘렌시아였는데 이젠 남편에게 물려줘야 하는 걸까.


남편이 자주 하는  술안주 요리는 숙주불고기였다. 손수 마트에서 숙주와 불고기를 사 와서 혼자 웍에 하는 뒷모습을 보니 어딘지 모르게 외로워 보였다. 나도 예전에 외로웠던 적이 있었는데 나는 무얼했나 되짚어봤다. 곁에 아무리 따뜻한 가족이 있고, 주변에 사람이 많아도 외롭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남편도 지금 그런 걸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자연스럽게 남편은 아이들에게 숙주불고기를 한 판해서 먹이고는 재차 냉장고에서 다시 자기 안주를 손수 만들었다. 예전에는 내가 해주는 음식 외에는 주방에 들어오지도 않았고 냉장고를 열어 보지도 않았는데 이제는 스스로 음식을 자꾸 만들기 시작하더니  "파 달라, 마늘 달라, 양파 달라"하며 나는 역할이 바뀌어 뒷모드하는 사람이 되었다. 사실 이런 남편 앞에선 엄지 척을 날리며 고맙다고 요리를 진짜 맛있게 아주 잘한다고 추켜세우지만 속사정은 짠했다.


아이들도 아빠가 해주는 요리들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다며 엄지 척과 볼뽀뽀를 날리니 그게 좋아서 하는 것인지 이유를 모르겠다. 부부란 그렇게 오래 살아도 속마음은 모른다더니 내가 그렇게 별반 다르지 않게 중년 부부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어제 우연히 TV 방송 프로에서 우연히 가수 부활의 김태원이 나오는 방송프로를 보았다. 기러기 생활을 종료한다는 축하로 집으로 친분 있는 사람을 초대해서 음식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는 방송이었다. 예전 김태원이 술을 엄청 좋아하고 많이 먹다고 하며 이제는 금주한 지 5년이 되었다고 한다. 살기 위해서 술을 끊었다고 했다. 반면에 김종서도 기러기생활을 18년째 하고 있는데 술을 입에 한 방울도 대지 않던 자신이었는데 외로워서 술을 입에 대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처음에는 알코올이 가장 낮은 맥주로 아주 조금 마시기 시작해서 잠을 잘 잤다고 했다. 이게 습관이 된 건지 점점 양이 늘어가고 알코올에 의지하게 되었다고 한다. 가수 김종서의 말 중에서 가장 놀라웠던 점은 일상을 생활하며 밤을 기다렸다고 한다. 왜냐면 어디를 가도 외로워서, 술을 마실 수 있는 밤만을 기다렸다고 했다. 지금은 그런 자신의 문제를 깨닫고 치료했다고 하는데 옆에서 함께 보던 남편이 떠올랐다.


유일하게 즐기는 취미는 골프뿐이지만 매일 갈 수는 없고 그렇다고 비용도 비싸서 자주 라운딩할 수 없어 최대한 절제하는 게 엿보였다. 대한민국의 가장이라는 책임감 때문에 싫어도 싫다고 한 번도 말하지 않고 꾸역꾸역 돈벌이를 하는 남편이 보였다. 그동안 남편의 외로움을 눈여겨보지 않았다. 강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아이들 뒷바라지하느라 남편을 잘 챙기지 못했던 게 떠올라 죄책감이 들었다. 아이를 제일 우선으로 챙겼던 일이 한두번이 아니기에 더 미안함이 올라오며 남편이 소주를 찾지 않고 외롭지 않게 해 줘야겠다. 오늘 퇴근하고 돌아오면 손 붙잡고 동네 한 바퀴 산책이라도 나가자고 졸라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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