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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선미 Jun 25. 2024

회고하는 남편의 마음

난임을 끝내며


막상 아내가 난임에 관련된 이야기를 책으로 써보겠다고 말했을 때 뜻밖으로 정말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꼰대 같은 얘기일지 모르겠지만 그 당시만 해도 ‘난임’이라는 말도 흔치 않았다. 그저 애가 늦게 들어서는 것일 뿐이라고 말할 뿐 사회적으로 이슈화되지 않았다. 사실 아내가 내 어머니와의 특별한 사건들이 많기는 했지만 이미 지나간 일이었고 거짓이 아니고 사실이었기에 번복할 수 없었다. 별나기도 별난 내 엄마였기 때문에 그동안 마음고생을 한 아내가 내 엄마와 연을 끊지 않고 오순도순 사는 모습을 보면 고마울 뿐이다. 시가가 싫어서 시금치도 먹기 싫다고 하는데 명절이나 생신때마다 손를 보여주려고 자주 왕래하면서 사는 모습이 존경스러웠다.     



요즘 시대에 초저출산과 난임이 문제 이긴 문제라고 생각했다. 주변 지인들만 봐도 난임으로 고생하는 부부가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나는 항상 우리 아이들을 시험관아기 시술로 낳았다고 당당하게 말하면 신기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그러면서 귓속말로 물었다고 했다. ‘시험관시술로 아기로 아기 낳은 게 창피하지 않으세요?’ 남편은 그제야 깨달았다고 했다. 여전히 난임으로 판정받고 인공수정이나 시험관 아기로 출산하면 축하할 일인데 쉬쉬한다는 사실을. 수십 년의 세월이 흘러 의학 과학 기술도 눈에 띄게 달라졌고 변화했다. 못 고치는 병이 없을 정도로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인데 음지에 여전히 숨겨져 있다고 생각했다.



앞으로는 환경문제로 인해 건강을 장담하지 못하는 시대가 왔다. 임신이 안 되는 게 여자 탓으로 생각하면 큰일이다. 남자의 정자 문제로 인한 난임이 늘어나고 있다. 앞으로는 산부인과에 가서 아기를 낳듯 반드시 난임 병원에 가야만 임신하는 시대가 도래할 거라 예측된다. 우리 인간이 살기 좋고, 편리해질수록 눈에 띄게 질병이 늘어났다. 대신 난임 병원에 다니려면 많은 시간과 금전적으로 비용이 많이 들 수밖에 없다는 말이 맞는 말이다. 나 또한 아내에게 돈만 밝히는 사람이었지만 아이만 생긴다고 답은 아니었기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난임 부부들이 견디기 가장 힘든 일이 주변 사람들의 불편한 시선을 뒤로하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숨죽여 난임 병원에 다녀야 한다는 사실을 듣고 한탄했다. 남자인 나로서도 애가 없는 나를 생각해 준다면서 으스대는 사람도 많았지만, 진심으로 걱정해 주고 방법을 일러준 사람들도 많았다. 여자가 남자보다 마음이 약하고 눈치가 빨라서 더 힘든 것은 사실이었다. 외출했다가도 팽 토라져 돌아오기 일쑤였고, 말하지 않고 꽁하고 있으니 답답할 때도 많았다. 여자와 남자는 다르기에 그저 내버려 둘 수밖에 없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아내에게 진심으로 말했다. “아이 없이도 나는 너만 평생 사랑하면서 살 수 있다”라고 그냥 둘이 살자는 말로 여러 번 설득했지만 막무가내였다.


 아기는 절대 돈으로 살 수 없고 부부만을 연결해 주는 끈이라는 생각이 들었는지 그 연이 없으면 금방 끊어질 거라고 말했다. 그럴 때마다 아내는 믿지 않아서 속상했고 더 설득할 힘이 없고 그저 아내가 하자는 대로 따라갈 뿐이었다. 임신이 된 것처럼 증상놀이를 할 때는 함께 기뻐했다가도 실패했다고 밝혀지면 며칠을 울며불며 칩거하면 정말 모든 걸 내려놓고 싶은 심정이었다. 혹여나 팔자에도 없는 아기를 낳으려고 이렇게 애쓰는 건가 싶어 불안하기도 했다.



아기를 낳겠다는 일념으로 죽기 살기로 덤비면서 간절하게 소망하고 애쓰는 아내를 바라보면서 실패할 때마다 하늘이 무너져내리는 것을 함께 느끼며 늪 속에서 허우적거렸다. 반면 임신에 성공하고 열 달 동안 불확실한 미래, 불안한 시간을 보내면서도 위풍당당한 임산부의 모습을 뽐내는 아내가 대견스럽다가도 안쓰러웠다. 긴 시간을 빙 둘러왔지만 출산할 때까지 긍정적인 생각만 하면서 버티고 버텼다. 직장생활로 밖에서 부정적인 얘기를 들으면 귀를 씻고, 입을 씻고, 아내와 아이에게 혹여나 해가 될까 봐 상갓집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맑고 순수했던 아내를 생각하면 나를 만나서 고생시키고 마음 아프게 한 것들이  수두룩하게 떠올라 미안함뿐이었다. 많은 남자가 그렇듯 결혼하면 변했다는 말을 듣기 싫어서 잘해주려고 무진장 애썼지만, 아내에게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잡은 물고기에 먹이 안 준다는 말이었다. 우스갯소리였지만 말속에 뼈가 있는 말이었다. 신혼의 달콤함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회사도 바빠지면서 조금이라도 빨리 경제적으로 안정되고 싶은 마음이 컸는데 아내는 그런 나를 이해해 주지 않았다. 함께 있는 시간보다 홀로 집에 남겨둔 시간에 대한 미안함이 컸다.


아내와 굿당으로 기도하러 갔을 때가 아직도 잊히지 않았다. 생전 처음에 간 곳이기도 하고 분위기가 심상치 않고 서늘한 기운이 감도는 곳이라 무서웠다. 공포영화를 봐도 겁내지 않던 나였는데 졸보가 된 것처럼 움츠러들었다. 그날 우리 부부는 얼마나 절을 많이 하면서 빌었는지 다음날에 다리에 알배서 걷지도 움직이지도 못했다는 것은 극비였다. 둘만의 추억이지만 그때의 일은 일부러 꺼내서 이야기하지도 않는다. 쓸데없이 돈 낭비했다고, 괜한 허튼짓 했다고 후회가 된다기보다 얼마나 갖고 싶어서 고군분투했었는지 서로 알기 때문이다.


두 아이를 시험관 아기 시술로 낳으면서 조금 더 빨리 병원에 갔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후회가 든다. 그러면 아내와 싸우는 일도 적었을 테고, 결혼하자마자 아이를 낳았으면 아이가 벌써 대학생이 됐을 거라며 너스레를 떨어본다. 앞으로도 아이들을 키우려면 내 노년을 준비하기는커녕 아이들 뒷바라지할 시간밖에 남지 않았다. 현재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는 아이들을 보면 바라는 것 없이 행복하다. 큰아이는 자기가 어떻게 세상에 귀하게 태어났는지 말해줬기에 의젓하고 대견하기도 하다. 앞으로도 행복한 우리 집을 만들기 위해 애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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