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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선미 Jul 26. 2024

난임 치료 오픈런 나도 해봤다

원정 떠나는 난임 환자들



"새벽 3시에 원정 떠나는 난임 환자들"
전국에서 난임을 치료하는 부부가
24만 명을 넘었다.



어제저녁 식탁에 앉아서 남편과 김치찌개를 먹으면서 남편이 틀어놓은 뉴스앵커의 목소리가 들렸다. 평상시에는 잘 듣지도 않던 뉴스인데 때마침 내 귀를 솔깃하게 하는 제목이었다.


나는  꽤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난임'이라는 짧은 단어가 그냥 쉽게 지나쳐지지 않는 걸까 생각했다.


(그전에는 임신, 입덧, 출산, 돌, 백일 등등 아기에 관련된 말들이 내 귀에서 콕 박혀서 하루종일 머릿속에서 둥실둥실 떠다녔었다. 머리를 흔들어서 그만 생각하려고 해도 더 깊숙이 파고들었다. 누가 보면 '임신 집착증'이 있다고 할 정도로 집착했다. 남편에게 내가 언제 집착했었냐고 강하게 그 말을 번복할 없었다. 왜냐하면 사실 그대로 집착했으니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나도 결혼하고 나서 2년 동안 아이가 생기지 않자 집안에서 우리를 가만두지 않았었다. 양가에서는 나를 한의원으로 점집으로 끌고 다니면서 방도를 찾았다. 우리 부부라고 어린애처럼 생각 없이 손 놓고 있었던 것도 아닌데 노심초사 안절부절못하셨다. 나도 남편과 산부인과에 가서 검진도 받고 노력을 하고 있었는데 성에 차지 않으셨는지 아니면 임신이 되었다는 빠른 답변을 드려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니 애가 타셨는지 더 성화셨다.


남편과 나도 서로 영양제도 챙겨 먹고 체질개선제를 먹으면서 노력했다. 나는 손발이 차다는 한의원 원장님의 말을 듣고 한약도 한약이지만 수지침을 배우러 가서 쑥뜸까지 매일 뜨고 몸의 온도를 올리기 위해 애썼다. 그래도 임신은 되기는커녕  점점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지쳐만 갔다.


임신도 때가 있다면서 나이를 앞세워서 한 살이라도 젊을 때를 강조하면서 한시라도 쉴 틈을 주지 않았다. 그렇게 임신이 되는 것도 아닐 텐데 엄한 나만 잡았다. 남편은 사업한답시고 매일 술이었고 병원일정을 잡아도 병원에 오지 않을 때도 있었다. 그런데도 남편은 잘못이 아니었다. 임신은 여자의 몫처럼 혼자서도 할 수 있는 것처럼 여겼다. 차라리 그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정말 매일 아침 태몽을 꾸시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확인 전화를 하셨는데  그 덕에 나는 노이로제가 걸려서 전화 벨소리 울렁증이 생겼다. 그 후로 여전히 지금도 전화기에 벨소리로 설정을 못하고 진동으로 해놓고 있다. 그 사실도 모르고 남편은 왜 진동으로 해놓냐고 성화다.





채널 A 뉴스기사 출처


어제 뉴스기사를 보고 할 말이 많았다. 예전이나 다름없이 난임치료를 위해 원정을 간다는 말.

원정 출산은 들어봤지만 난임치료를 위해 서울로 원정 떠난다는 말이 가슴에 걸렸다.


나도 서울로 난임치료를 다닐 때 병원 근처의 모텔에서 자기도 하고 집에서 새벽 3시에 출발하는 것은 다반사였다. 왜냐면 진료시간보다 미리 가서 초음파실에서 상태를 확인하고 진료를 봐야 한다.


더구나 아무리 일찍 간다고 한들 예약한 시간에 진료를 받는다는 보장도 없다. 때론 예약의 의미가 없어 보이기도 하지만 병원의 특성상 예약은 필수다. 우리는 기다리다가 지치게 되는 게 바로 난임 치료이다.




난임은 인내의 과정이다.
검사하고 기다리고,
시술받고 기다리고,
진료받고 기다리고,
설명 듣고 기다리고,
피검사하고 기다리고,
기다림의 연속이다.


몇 시간 기다리고 진료는 정말 짧게 2분에서 3분이니 얼마나 속이 탈까. 때로는 허탈하기까지 했다.  교수님께 몇 분을 보려고, 긴 시간을 대중교통이나 자가운전으로 부부가 힘을 쏟아도 임신이 된다는 보장도 없기 때문이다.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금전적으로 곳에 끌어모아서 난임을 극복하려는 부부의 이야기.


"왜 그렇게 아기를 낳고 싶으세요?"라는 질문을 난임 치료를 받는 부부에게 했다.

그 부인은 "그냥 아기와 셋이서 여행 가는 게 꿈"이라고 하는데 정말 얼마나 간절할까 하는 마음이었다. 나도 예전에 그랬었는데. 그냥 소박하게도 남편과 나를 닮은 아이를 낳아서 오순도순 행복하게 사는 게 꿈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꼭 아기를 낳아야 했다. 예전만 해도 대가족으로 살 때는 한 지붕에서 3세대가 살았다.


 나 또한 어린 시절에 할머니와 함께 살았으니 북적북적거렸지만 따뜻했다. 진즉에 가족의 기준이 달라지고 있었지만 온전한 가족이라 함은 아기를 낳아서 3인이나 4인의 형태를 가진 핵가족을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시대가 변해서 딩크족, 비혼주의, 한부모가족이 늘어나고 있는 시대이기는 하지만 아기를 낳고 싶어 하는 부부가 더 많다는 현실이다.  부모님께서도 행복한 가족, 온전한 가족, 안전한 가정이라고 일컫는다.



아이 키우는데 돈이 많이 들어가는 것은 사실이지만 아이를 낳고 기르면서 얻는 행복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권태기를 극복하는데도 아이들이 한몫하듯이 부부지간에 자식이 있어야 한다는 말을 이제는 어느 정도 공감한다.


첫째가 17년 전에 시험관  아기로 태어났고, 둘째도 시험관 아기로 13년 전에 태어났다. 그 당시 내 나이가 빠른 나이도 아니고 늦은 나이도 아니었지만 원인불명의 난임은 정말 더 혼란스럽게 했다. 무엇보다 우리는 난임을 인정하지 않았다. '때가 되면 생길 거라는 말을 믿었다.' 그리고 막연하게 무슨 일이 있더라도 자연임신으로 아기를 낳아보겠다는 각오를 한 것처럼 전국으로 임신에 좋다는 한약방이나 절이나 굿당까지 찾아다녔으니까 말이다. 기독교가 아니고 불교였기에 더 무속신앙에 의지했는지도 모르지만 이렇게 하면 낳을 수 있다는 말에 어쩔 수 없었다.


 '물에 빠지면 지푸라기라도 잡는다'라는 속담처럼 비싼 비용을 들이면서도 희망고문에 넘어가서 시간과 돈을 낭비했다. 어디 그뿐인가 상처받은 마음은 어떡하라고. 사람을 믿지 못하고 인간관계에서 자꾸만 소외되기 시작했다.




남편은 계속 둘이 살자고 설득하고 나는 꼭 아기를 낳아야겠다고 충돌했다. 거기에 시어머니까지 거들어서 더 힘든 난임기간을 겪었다. 남편은 내가 임신에 너무 집착해서 아기가 안 생기면 죽어버리겠다는 말까지 하니까 어쩔 수 없이 거들어주었다.


남편들은 대부분 여자가 아기를 낳고 싶어 하는 마음을 알지 못한다. 또한 자연분만하려고 애쓰는 것도 이해하지 못한다.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여자와 남자의 뇌구조는 다르기 때문에 서로 이해하려고 하지 않고 건드리지 않으면 문제없다. 난임치료하면서 부부싸움을 가장 많이 한다. 우리 부부도 그랬다.





뉴스나 정부에서 조만간 난임부부를 위한 혜택을 여러 가지 대책으로 내놓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지금도 신혼부부를 위한 주택으로 다양한 조건을 내세우고 있지만 더 조건 없이 병원과 약제에 대한 보상이 더 커져야만 인구소멸 시대에서 살아남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지금 양가 부모님이 살고 계시는 동네가 소멸도시라고 벌써 대책을 세우고 있다. 정말 이사를 나가는 사람이 많고 사람이 살던 가구가 공장으로 바뀌는 것을 보고 온몸으로 실감할 수 있었다.


부디 난임 치료를 원하는 부부들에게 열린 마음으로 바라봐 주고 환경적으로 편리한 것보다는 불편해도 건강을 생각하는 대책이 많이 나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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