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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선미 Jul 19. 2024

아버지의 보호자가 되었다

아버지는 재작년 내가 당했던 교통사고 이후로는 병원 갈 일이 생겨도 전화를 하지 않으셨다. 벌써 재작년 10월의 일이다. 아버지는 대장내시경을 1시에 예약하셨고, 나는 집에서 아버지를 모시러 호남 고속도로를 달리던 중에 공사구간이 있어 멈춰서 있었다. 모든 차들이 비상등을 켜고 멈춰서 주자창처럼 보였다. 내 차도 그랬고, 앞의 차도, 옆의 차도, 뒤의 차도 줄줄이 서 있었다. 나는 앞을 멍하니 응시하면서 잔나비 노래를 듣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뭔가 뒤에서 엄청나게 "쾅"하는 소리가 들리면서 내 차에 충격이 가해지면서 앞으로 움직였다. 깜짝 놀라서 나도 모르게 오른발에 더 힘줘서 브레이크를 잡아도 차는 멈추지 않고 계속 앞으로 밀렸다. 그렇게 고속도로에서 4중 추돌사고가 났던 것이다. 나는 중간에 끼었다. 내 차 앞에 큰 트럭이 있었는데 사고 난 후에 엄청 혼났다. 잘못했다가는 트럭 밑으로 들어갈 뻔했다면서 큰 차 뒤에는 따라가는 거 아니라고. 그 사고는 하늘에서 도왔는지 다행스럽게도 몸은 많이 다치지 않았지만 6개월 밖에 안된 차가 폐차되었다. 그리고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트라우마가 생겼고 오랜 시간 허리, 목을 재활치료했다. 


아버지를 태우러 가던 도중에 난 사고였다. 그 당시 나는 정신없는 와중에도 119에 먼저 신고하지 않고 아버지께 전화를 걸었다. 왜냐면 병원 갈 준비를 마치고 나를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말이다. 도저히 아버지께 "교통사고가 났다"라는 말을 차마 할 수 없어서 집에 갑자기 일이 생겨서 못 갈 거 같다고 핑계를 댔다. 집에서 출발할 때 전화를 걸어 "아빠, 저 출발해요."라고 말했었는데 뚱딴지같이 못 온다니 아버지는 한숨을 쉬며 "그럼, 나는 어떡하냐"라고 화난 목소리로 소리쳤었다. 다급해진 나는 시간이 없으니 그냥 아버지 차로 운전해서 가시라고 말했다. 그러면 병원에 주차된 아버지 차는 언니나 남편이 퇴근하면서 집으로 끌어다가 놓겠다고 설명했다. "알았다"라고 짧게 말하시고 아버지는 시간이 없어 손수 차를 운전해서 병원으로 가셔서 대장내시경을 마쳤다.


나중에 그날 저녁이 되고 나서야 아빠는 내 소식을 듣게 되었다.  아버지는 자신 때문에 딸내미 먼저 잡을 뻔했다면서 후회했고 자책하셨다. 그리고 그 후로 집에 무슨 일이 있거나 병원에 갈 일이 생기면 나를 항상 제외시켰다. 대부분 병원에 다니실 때는 자가운전을 해서 가시지만, 수면내시경을 하거나 백내장 수술하러 갈 때에는 언니, 오빠들에게 부탁했다.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지만 때로는 조금 서운하기도 했다.






얼마 전 아버지는 언니에게 대장 내시경과 위 내시경을 예약했다면서 시간 되냐고 물었다. 직장에 다니는 언니는 연차를 써야 하는 상황이고 오빠들도 모두 연차를 써서 시간을 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정식으로 직장인이 아닌 나에게 사 남매가 있는 단톡방에서 언급됐다. 남편 사무실에 출근하는 나는 연차를 안 써도 된다고 생각했는지 다급해지면 내가 나서야 했다. 그 사실을 알고 미리 아버지께 전화를 드렸다. 내가 아버지 내시경할 때 모시고 간다고. 그랬더니 아버지는 신신당부를 하셨다. "천천히, 조심하고 또 조심해서 오라고."

아버지네 집으로 가는 길에는 꼭 고속도로를 거쳐서 가야 한다. 경부선과 호남선을 골라서 갈 수 있지만 사고 후로는 호남선이 아닌 경부선으로 친정에 갔었다. 아직도 사고 장소에 가면 움찔해졌기 때문이다. 그렇게 아버지를 모시고 종합병원에 도착했다.


아버지를 모시고 병원에 오는 게 처음은 아닌데도 항상 보호자가 되어 아버지 성함이 호명될 때 달려가는 마음이 새롭다. 내시경실에 들어가자 간호사는 말했다. "보호자님께서 아버님 탈의하는 것 좀 도와주세요."라고 아버지는 지팡이를 짚고 있었고, 오른발은 반 깁스를 해서 파란색 깁스신발을 신고 계셨다. 누가 봐도 혼자서 하기 힘들어 보였을 거다. 나는 커튼을 치고 아버지 탈의하는 것을 도와드리려고 했는데 아버지는 혼자 할 수 있다고 나가라고 했다. 속옷도 벗고 바지를 입으라고 해서 그랬을지도 모른다.


한참을 기다려도 아버지가 말이 없자 커튼에 대고 "아빠, 다 갈아입으셨어요?"라고 물었다. "아직 덜했다"라고 아버지는 짧게 답했다. 오른쪽 무릎이 이상이 있어서 보조기까지 차고 왔다고 나중에야 말해서 알았다. 긴 바지를 입었으니 알 수 없었다. 아버지는 자신이 하고 있는 깁스와 무릎 보조기, 지팡이를 가리키면서 "내가 마지못해서 산다"라고 말했다. 그 말이 목에 걸려 침이 넘어가지 않았다.


아버지는 내시경을 하러 들어가시고 보호자는 대기실에서 기다리라고 해서 내시경실을 나왔다. 금방 끝난다고 했던 내시경은 위내시경과 대장내시경을 한꺼번에 해서 그런지 시간이 꽤 걸렸다. 하나둘씩 보호자 대기실에 있던 사람들은 호명되어 보호자를 인계하여 집으로 갔다. 마음이 급해져서인지 자꾸 시계를 보게 됐다. 시끌시끌했던 복도가 한적하니 고요해졌다.



 1시간이 훌쩍 지나서야 간호사가 "ooo 씨, 보호자님 계세요?"라는 말을 듣자 용수철처럼 튕겨나가며 "여기요"라고 외치며 달려갔다. 회복실에 들어서자 빈 침대가 나란히 보였다. 한쪽 벽면 귀퉁이에 아버지가 침대에 앉아계셨다. 탈의한 옷을 가져오라는 눈치였다. 탈의실 옷장에서 아버지의 바지와 속옷, 보조기와 지팡이, 깁스 신발을 챙겨 가져다 드렸다. 아버지는 기운이 하나도 없어 보여 금방이라도 옆으로 쓰러질 거 같았다. 내가 옷 입는 것을 도와드려야 할 거 같았다. 하지만 아버지는 막내딸인 내게 아직은 보여주기가 민망하신지 밖에서 기다리라고 했다. 커튼을 쳐드리고 한참을 기다리고 나서야 "입었다"라고 말했다.


내시경 상황을 간호사에게 설명을 들었다. 위에 용종이 여러 개 보였고, 대장에서 용종을 하나 제거했다고. 위와 대장에 있는 용종을 조직검사하려고 보냈다고 말했다. 오늘은 교수님 진료가 없는 날이라 자세한 결과는 다음 주로 예약해 주겠다고 말했다. 그날 오시면 조직검사 결과도 들을 수 있다면서 말했다. 아버지를 부축해서 조직검사비를 수납하고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가서 아버지 집으로 향했다. 차를 타고 가는 도중에 흰 죽과 전복죽을 샀다. 아버지는 차 안에서 위에 용종이 있다는 말에 놀란 눈치였다. 재작년에도 대장내시경할 때는 용종이 19개여서 두 번에 나눠서 제거했는데 또 생겼다면서. 그럼 나는 스무 개나 용종을 제거한 거라면서 믿을 수 없다고 했다. 아버지는 왜 이렇게 용종이 생기는지 모르겠다며 궁금해했다. 나이 들면 죽어야 한다면서도 나는 알았다. 아버지가 두려워하고 불안해하고 있다는 것을. 벌써 여러 차례 진행했던 대장내시경을 하면서 그 과정들이 너무 싫었고 조직 검사결과를 기다리는 고통을 알기 때문이다. 병원에서 "아무 이상 없네요"라는 말이 그 어떤 말보다 기쁜 말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말이다.


아버지 나이가 곧 여든이다. 안 아픈 곳이 없다고 말하지만 병원에 갈 일이 있으면 내게도 전화해도 된다고 했다. 아버지는 사 남매 중에서 돌아가면서 했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다들 직장 생활하느라 바쁜데 부모가 돼서 도와주지는 못하고 부려먹기만 해서 미안하다고 했다. 아버지가 그동안 나의 보호자였으니 이제는 내가 보호자가 되어드리겠다고 했다. 그러자 아버지는 빙그레 웃으시면서 고맙다고 했다. 


아버지, 언제든지 전화하세요.
아무 때나 달려가드릴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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