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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뭐야 Nov 29. 2022

메아리

그날을 극복하며

<1>


삶이란 시작부터 끝까지 공허하기 그지없다. 푸르른 봄의 앞날을 꿈꾸는 찬란한 불꽃은, 예측조차 못하는 사고 하나에 한 줌의 재가 된다. 앞으로 살아갔을 삶의 의미나 목적 따위는 그저 사망자 수치에 덧셈으로만 남을 뿐이다.


오늘 우리는 누군가를 기억하지만, 다음 주면 까마득히 잊을 것이다. 내일도 홍대 거리에는 사람이 북적일 것이고, 다음 주에도 야구장에는 관객들이 북적일 것이다. 그리고 내년에도 이태원 거리는 할로윈 분장으로 가득할 것이다. 정치인들은 알맹이조차 없는 ‘이태원 할로윈 특별법’ 따위를 만들어 그들을 방패로 쓰고는, 법안이 질타를 받게 되면 상대 당을 모욕하기 위한 수단으로 그들을 총알로 쓸 것이다.


가치 있는 삶이란 무엇일까. 이들의 삶은 과연 가치 있는 삶이었을까. 이들의 삶의 가치를 천국과 지옥의 잣대로 평가할 수 있을까. 없다면, 천국과 지옥이 존재하기는 하는 것일까. 없다면, TV 다큐멘터리에 나오는 동물의 삶과 다를 게 무엇이 있을까.


오아시스가 신기루일지도 모른다는 허무함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중이다. 그럼에도 앞으로 떠밀려 나아가야 함에 내딛는 발로 흙먼지를 일어 바람에 날려 보낸다.


달은 오늘도 기울어 간다.




<2>


누군가의 무덤 앞에 우리는 싸움판을 벌이고 있다. 


죽음에 대한 원인을 낱낱이 밝혀 정의를 실현하겠다는 자들이 나오기 시작한다. 정의. 그 미명 하에 너희의 모든 행동이 정당화될 수 있다. 정의는 너희의 창 끝에 정당함을 담아줄 것이다. 너희의 창에 저항하는 자의 몸짓을 ‘죽음 앞에 책임을 피하려는 악인의 몸부림’으로 만들 것이다. 너희가 창을 찌르지 않아도, 수십, 수백 개의 창들이 너를 뒤따라 정의를 실현하러 올 것이다.


정의(正義). 진리에 맞는 올바른 도리. 올바른 도리가 무엇일까. 죽음 앞에 숙연해지는 것. 죽음의 원인을 규명하는 것. 죽음의 책임을 묻는 것. 모든 것이 올바른 도리겠지만, 무엇보다 이 안타까운 죽음이 다시금 반복되지 않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누구도 그것을 얘기하지 않는다. 모두 뒤를 보며 논쟁할 뿐이다. 누구도 앞을 보지 않는다. 저 앞에 안타까운 죽음이 다시 반복될 것이라는 사실을 모른 채.


비난의 수단일 뿐인가? 그들의 죽음이?

공격의 수단일 뿐인가? 그들의 목숨이?


이름 없는 무덤 앞에 이끼만 수북하다.




<3>


당신들의 삶의 의미는 무엇이었나.

당신들의 삶은 가치가 있었나.

당신들의 삶에 후회는 없는가.


질문들을 던져보지만

답할 이 없어

메아리쳐

나에게

돌아온다


나의 삶의 의미는 무엇이었나.

나의 삶은 가치가 있었나.

나의 삶에 후회는 없는가.


질문들이 꽂힌 나의 가슴팍 위로

미련이 줄줄 샌다.




위의 글 3개는 약 한 달 전 할로윈에 일어났던 안타까운 사고에 내 감정의 오르내림을 주체하지 못해 어떻게든 해소하기 위해 쓴 글이었다. 아직도 나는 영상으로만 접한 그 섬뜩한 광경이 머릿속에서 안 지워진다. 클럽 음악의 생명력이 잔뜩 채운 거리 위에 가지런히 정렬된 싸늘한 몸뚱아리들은 나에게 공포심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그때 느꼈던 것 같다. 삶이 참 부질없음을.


1920년대 미국의 젊은이들을 'Lost Generation'이라고 부른다. 세계 1차 대전과 스페인 독감을 앓으며 내면에 공허감과 환멸감뿐인 이들이 마치 길을 잃은(lost) 것과 같다고 하여 '길 잃은 세대'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다. 이들의 텅 빈 내면을 채우기 위해 사용한 방법은 다름 아닌 돈이었다. 전쟁에서 승리한 후 유래 없는 호황기를 맞은 미국 경제 속에서, 사치와 유흥을 통한 물질적 쾌락은, 인생의 목표와 의미가 사라진 그들의 공허한 곳을 빠르게 채워나갔다. 물론 이것들의 그들의 내면을 온전히 채워주지도 못하거니와, 얼마 안 가 미국에 경제 대공황이 들이닥친 탓에 쾌락의 시대는 빠르게 사라졌다.


하지만 아쉽게도 나는 이들을 따라 하기에는 통장이 너무나도 얇았기에, 지갑을 드는 대신 펜을 들었다. 아니, 타이핑했으니 타자기를 들었다고 하는 편이 맞겠다. 그렇게 위의 글 3편이 완성되었다. 내가 앞으로 살아가야 할, 모두가 앞으로 살아가야 할, 이 부질없는 삶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고, 그 과정을 내 속으로 삭이기에는 용량이 너무 작아 글로 끊임없이 내뱉었다.


그 끝에 내린 결론은 '행복하자'는 것이었다. 이 위태로운 삶의 곡선이 갑작스럽게 끝나더라도 지금까지의 인생에 후회가 없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 삶을 살자고, 그러기 위해서는 내 선택이 옳았음을 꾸준히 증명해내자고, 그러기에 꼭 행복해지자고 다짐했었다. 이 모든 과정을 시간이 다소 흐른 지금, 거리를 조금 둔 채 보니, 반오십을 조금 넘긴 나이의 사람이 한 생각 치고는 꽤 성숙하게 극복한 것 같아 흡족했다,라고 말하며 겸손하지 못한 것을 보니 나는 아직 어린것 같다.


서른 살의 내가 이걸 볼 날을 기대하며, 오늘도 키보드의 힘찬 파열음으로 방 안을 가득 채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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