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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뭐야 Dec 26. 2022

<숯>

6시에 5번 출구에서 너를 보기로 했다. 평상시보다 조금 일찍 출발했다. 너는 늦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저 위에 보이는 바깥의 가로등 불빛이 보인다. 그곳까지 엄청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계단을 따라 위로 올라간다. 에스컬레이터 좀 깔아주지, 투덜대기도 전에 눈을 싣고 온 찬바람이 패딩을 뚫지 못해 화가 나는지 얼굴만 사납게 때려댔다. 다행히도 귀가 빨개지기 전에 입구 앞에서 너는 손을 흔들며 나를 맞이했다.

카페 안에 들어가 있으라니까.

금방 온다는데 마중은 나와야지.

시간의 열기를 머금어 따뜻해진 핫팩을 건네주는 너를 본다.

이런 거 준비하는 습관은 어디 안 갔구나.

한결같다고 볼 수 있지.

장난스러운 대답을 하면서도 네 눈은 바쁘게 움직인다. 지도 어플 한 번. 앞에 빙판길이 있는지 한 번. 뒤에 내가 잘 따라오는지 한 번. 다시 지도 어플 한 번.

왜 이렇게 오랜만에 보는 것 같이 느껴지지?

진짜 오랜만이니까.

벌써 그렇게 지났다고?

1년은 넘었을걸.

아니야, 너 생일 때 내가 그래도 한 번은 봤을 텐데.

그때 나 일 때문에 바빠서 약속 파토 났잖아.

아, 하고 기억을 더듬어 보니 그랬던 것 같기도 하다. 하긴, 항상 바빴던 너였으니까. 20살이 되자마자 시간표를 각종 알바로 빼곡하게 채웠던 너였으니까. 놀자고 물어보면 항상 알바가 있다는 얘기로 거절할 게 뻔해서 안 물어보는 게 낫겠구나 싶다가도 오기로 한 번 더 물어보게 되는 너였으니까. 그렇게 악착같이 시간을 빼내 만나면, 긴 시간의 거리감을 언제든지 특유의 배려심과 어른스러움으로 다시금 채워줄 거라는 믿음을 갖게 만드는 너였으니까.

이상하다.

뭐가 또.

넌 왜 오래간만에 봐도 그런 것 같지가 않냐.

헛소리 할 거면 맛집이나 찾아봐.

예예, 형님.


그래서, 그때 얘기한 그 쪽으로 확실히 성공한 거야?

술잔을 살짝 드니 젓가락으로 향하던 너의 손이 술잔으로 방향을 튼다. 짠. 한 잔.

어찌어찌 되기는 하더라.

야, 그만큼 했는데 안 되는 게 더 이상하다.

이상하기는, 이 바닥에서 이만큼 하고도 실패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아니, 그래도. 너 예전부터 학점도 다 던지고 몰두한 게 그 쪽이잖아.

맞기는 한데, 놀 건 다 놀고 한 거라서 딱히 그렇지는 않은데.

그게 다 논 거라고 말하면 내가 뭐가 되냐?

잠을 줄여서 일하는 시간과 노는 시간을 둘 다 잡으면 되는 것을.

그걸 우린 괴물이라고 표현하기로 했어.

내가 좀 괴물이야, 라며 웃는 네 얼굴에 다시금 술잔을 내민다. 짠. 두 잔.

진짜 너는 보면 볼수록 신기해.

오늘 신기한 일이 좀 많네?

아니, 너는 무슨 확신으로 그렇게 일에 몰두할 수 있는 거야?

확신이 있던 적은 딱히 없었는데.

너는 그럼 확실하지도 않은 것에 인생을 건 거야?

정확히는 오기가 맞겠다. 안 되면 안 된다는 생각. 안 되면 진짜 망한다는 생각.

어우, 난 그렇게는 못 살아. 난 나를 그렇게까지 채찍질하며 살 용기가 없다.

음.


타는 고기를 바쁘게 뒤집던 너의 젓가락에 시선이 꽂힌다.

나도 그렇게 살고 싶어서 사는 건 아니야.

무슨 소리야? 미친 듯이 일에 몰두하는 걸 좀 내려놓기만 해도…

포기하면 안 되는 상황에 놓여본 적 있어?

당연히 있었지,라는 말이 나오려다가 뚫어져라 쳐다보는 너의 눈빛이 말문을 틀어막는다. 마치 함부로 ‘당연히’라는 말을 붙이면 안 된다는 듯이.

그런 상황에 놓여보면 알게 될 거야.

나를 바라보던 네 눈빛이 다시금 불판의 고기 위를 향한다. 불판 아래 숯이 시뻘겋게 열기를 내뿜고 있었다. 한 번 태워진 나무는 물기가 다 빠진다. 더 뜨겁게 열기를 내뿜는다. 더 뜨거운 열기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우선 한 번 태워져야 한다. 태워지지 않으면 안 된다.

어서 먹어라, 고기 탄다.

이글거리는 불길에 시선이 팔린 사이 내 접시 위에 알맞게 익어진 고기가 잔뜩 놓여있다. 고기 한 점을 먹고 다시금 술잔을 든다. 짠. 세 잔.


이번에 보면 다음에는 언제 보냐?

글쎄다. 그래도 얼굴 까먹지 않을 정도로는 보면 되는 거 아닐까?

진짜, 예나 지금이나 일에 치여 사는구나.

그래야지 어쩌겠어.

에휴, 하며 내쉰 네 한숨에 입김이 잔뜩 내뿜어졌다 사라진다.

갈게, 다음에 또 봐.

그래, 또 보자.

돌아서서 반대편 개찰구를 향해 걸어가는 네 뒤통수를 보다 참던 질문을 던진다.

야!

뒤를 돌아본 네 얼굴을 마주하니 물어보려던 질문이 목구멍에서 나오지를 않는다.

아니, 사람을 불렀으면 얘기를 하세요, 선생님.

애써 숨을 들이쉬고, 다시금 말을 뱉는다.

괜찮지?

갑자기?

뜬금없는 질문이 네 고개를 갸웃하게 한다.

괜찮으니까 네 얼굴 볼 시간 나는 거지.

그렇지. 하긴.

그렇지,라는 말이 입안에서 계속 맴돌 뿐이다. 그렇지, 그렇지.

야, 지하철 전 정거장이래. 진짜 간다?

어? 어. 조심히 가.


헐레벌떡 카드를 찍고 계단 아래로 사라지는 너의 모습을 보며 다시금 말을 되감는다. 그렇지. 아니, 사실 원래 물어보고 싶은 질문은 괜찮냐는 것 따위가 아니었다. 그래서 행복하냐고. 행복한 삶을 살고 있냐고. 내가 꿈꿀 수 없는 삶을 살아가는 너에게 물어보려던 그 질문은 차마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너의 얼굴을 보자마자 아까 한 말이 떠올라서.

그런 상황에 놓여보면 알게 될 거야.

그런 상황. 한바탕 타오르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 숯이 되지 않으면 재가 되어 사라지는 상황. 타올라본 적이 없는 내가 감히 너에게 그런 질문을 던질 수 있을까. 감히 너에게 행복의 척도를 매기라 말할 수 있을까. 감히 너의 행복의 기준을 부정하려는 시도를 해도 될까.

네가 부러웠던 시절이 있었다. 항상 어른스러움을 간직한. 항상 확신에 찬. 항상 듬직한. 항상 철든 어른인. 항상 배려심이 넘친. 그런 삶의 결과물을 동경했었다. 삶의 과정은 미지의 영역에 남겨둔 채.

호주머니에서 네가 줬던 핫팩을 꺼낸다. 패딩 주머니에 모든 열기를 전달한 채 차갑게 식었다. 있는 힘껏 쓰레기통에 싸늘한 주검을 던진다.

탕. 금속 쓰레기통에서 시작된 소리가 역 안에 메아리처럼 울려 퍼져 나에게 돌아온다.

탕.




유독 쓰는 데 오래 걸리는 글이 있다. 지금까지의 글들은 탈고의 시간이 오래 걸렸던 거지, 완성 자체는 대개 하루만에 끝나곤 했다. 이번 글은 완성까지만 무려 3일이 걸렸다. 쓰다가 인물 설정을 바꿔야 하나, 서술을 추가해야 하나 등의 고민을 많이 했는데, 동시에 쓰다가도 몇 번이나 '때려칠까'는 생각이 제일 많이 들었던 글이다. 그래도 어거지로 저장해가며 써내려가서 완성은 해냈는데, 나중에 읽으면서 보람을 느낄지 부끄러움을 느낄지는 미래의 나에게 맡기겠다.


같은 영어 동아리에서 정말 미친듯이 과외를 하던 분들이 계시는데, 사실 학원 강사의 꿈을 접은 건 그 분들 덕분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저렇게 열심히 하지 않으면 이도 저도 아니게 되는 곳이 사교육 시장인지라, 내가 과연 저런 분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때 동아리 단체 술자리에서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가, 퍼뜩 적어둬야겠다 싶은 말이 있어 메모장에 적었다.


철듦은 불쌍한 거다.


물론 이 글에 저 주제를 명시적으로 적지는 않았다. 주제를 적지 않고 읽는 이가 자연스레 생각할 수 있게끔 하는 글을 쓰고 싶어서 그랬던 걸지도 모르겠다. 과연 그 정도의 글이 나왔을런지는 모르겠지만, 그랬으면 좋겠다.


이 분들이 이 글을 읽게 될지는 잘 모르겠는데, 확실한 건 모두 행복하셨으면 좋겠다는 거다. 행복합시다. 꼭.



연말이라 술 약속이 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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