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면대 수도꼭지를 둘러싼 조카와의 한바탕 눈치 싸움
설 명절을 맞아 조카가 집에 와 있다.
그동안은 주말에만 짧게 보아 아쉬움이 컸는데, 지금은 오랫동안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어 최대한 많이 놀아주려 하고 있다.
어느덧 어린이집을 졸업하고 유치원에 다니게 된 조카. 요즘 보면 비단 등원하는 장소만 변한 게 아닌 것 같다. 배우는 속도 역시 달라졌다. 부쩍 빨라진 것 같은 기분이다. 어린이집이 주로 보육 위주라면 유치원부터는 교육 위주라고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는데 그 때문일까. 볼 때마다 조카의 지식이 나날이 풍성해짐을 느끼는 요즘이다.
어린이 프로그램을 볼 때면 나도 모르는 지식을 척척 이야기하는 아이. 예컨대 티라노사우르스 밖에 모르는 나에 비해 공룡의 모습만 보고도 외계어 같은 이름을 척척 맞출 때라던지. 낙타의 혹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등 어려운 지식을 술술 이야기할 때 놀라움을 자아낸다.
오늘은 저녁에 씻기다가 이러한 '우와'의 순간이 찾아왔다.
저녁 잠자리에 들기 전, 세면대에서 세수를 시키고 있을 때였다. 조카를 씻기기 위해 세면대에서 물을 트는데 자꾸만 아이가 수도꼭지를 들어 올려 끄는 행동을 반복했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 세 번을 말이다. 처음에는 얘가 씻기 싫어서 그러나 아니면 장난을 하는 건가 싶었다. 그런데 수차례 끄는데도 내가 수도꼭지를 자꾸만 다시 틀자 조카가 작은 목소리로 한마디를 내뱉었다.
이모, 지구가 아프대...
‘...!...’
조카는 내가 물을 낭비하고 있는 점을 지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마개를 끼워 놓고 물을 받아서 쓰면 괜찮아" 하며 내 나름대로 설명을 해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내 설명이 영 탐탁지 않았는지 조카는 양치를 할때도 세수를 할 때도 심지어 발을 닦을 때에도 계속 수도꼭지를 빨리 잠그지 못해 안달이었다.
그렇게 수도꼭지를 둘러싼 조카와의 한바탕 눈치싸움이 끝나고. 이제 내가 씻을 차례가 되었다. 평소처럼 샤워를 했는데 계속해서 조카가 했던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물줄기가 솨하며 시원하게 뿜어져 나올 때, 평소에는 시원하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오늘은 아니었다. 물을 낭비하고 있다는 생각에 묘한 죄책감마저 들었다. 자꾸만 레버에 손이 가고 어서 잠궈야겠다는 조급함이 밀려왔다.
평소 물을 아껴 쓴다고 한 것 같은데 아무래도 낭비를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오늘은 평소보다 족히 2배는 적은 양의 물로 샤워를 마쳤다. 그럼에도 찝찝하다거나 그런 느낌은 없었다. 오히려 작은 실천이지만 그래도 양심적으로 물을 사용했다는 사실에 뿌듯함이 느껴졌다.
한없이 어리게만 느껴졌던 조카가 이제는 바른말로 이모에게 가르침을 주고 있다. 앞으로도 지구가 아프다는 조카의 말을 자주 떠올리며, 내가 필요 이상으로 물을 쓰고 있지는 않은지 스스로 점검해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