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 장폴 사르트르
" 문학은 똥 같은 거야 "
1954년 스트라스부르의 한 식당에서 사르트르는 보부아르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 짧은 말로 문학에 대한 그의 깊은 애증을 느낄 수 있다. 중년에서 노년의 나이에 가까울수록 더 공격적이고 거칠게 변신한 사르트르. 그는 구토, 존재와 무의 작가로서 그리고 실존주의를 대표하는 철학자로서 당시 문학, 철학, 정치, 사상계에서 최고의 명성을 얻고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도 정치에 무관심했던 그가 한 사건을 계기로 공산당과 연을 맺고 그들의 동반자가 되어 적극적으로 참여운동을 하게 된다.
그 후 공산당에서 자아비판적 자기 성찰 후 문학이 지닌 가치와 작가를 숙명으로 받아들인 자신의 결정에 회의와 의구심을 갖게 된다. 그것이 그가 '말'이라는 자서전을 쓰게 된 동기이다. 그러나 자신의 삶을 단순히 되돌아보는 의미가 아닌 전쟁을 겪고 전후시대를 살아온 한 사람으로의 자신을 분석해 보려는 의도였다.
p166 " 나는 글쓰기를 통해서 다시 태어났다. 글을 쓰기 전에는 거울 놀이밖에는 없었다. 한데 최초의 소설을 쓰자마자 나는 한 어린애가 거울의 궁전 안으로 들어선 것을 알았다. 나는 글을 씀으로써 존재했으며, '나'라는 말은 '글을 쓰는 나'를 의미할 따름이었다. "
"나는 글을 씀으로써 존재했으며.." 이 문장에서 책을 읽던 내 시선이 갈길을 잃고 멈추었던 기억이 난다. 나는 무엇을 위해 존재할까? 존재의 목적이 있을까? 정신없는 육아에서 벗어나 존재의 무용성을 느끼던 내가 찾아 헤매던 물음이었다. 그런데, 어린 플루(사르트르 애칭)는 자신이 글쓰기를 통해 다시 태어났으면 글을 씀으로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 말에서 느끼지는 존재의 단단함. 그 두께. 나는 그때 먼지같이 후 불면 날아갈 듯 몹시 가벼웠다. (물론 태풍이 몰아쳐도 날아가지 않으리라...)
더 이상 많은 시간 엄마를 필요로 하지 않는 아이. 늙어 가는 부모님의 짐을 들어줄 수 없는 무능. 그리고 무엇보다 왕성하게 사회생활 하는 주변인들에 대한 엄마의 부러운 눈빛과 말. 외벌이로 버거워하는 남편의 푸념 (세 가족이 먹고 사는 데는 충분했으나, 미래에 대한 걱정) 아이와 함께 했던 내 시간들은 이들에게, 나에게도 저평가되었고 나는 알 수 없는 죄책감과 무능에 괴로워했다. 그러다가 찾게 된 것이 꽃이었다. 아이가 등교한 오전에서 3시 이전까지만 할 수 있는 일. 나는 꽃시장에 매일 가기 시작했다. 꽃이 너무 좋아서 홀린 듯도 했다. 꽃향기가 가득한 그곳에서 황홀한 기분도 들었다. 지금 돌아보면 꽃이라는 대상에 도취된 상태이기도 하면서 돈까지 벌기를 원했으니, 꽃 한 송이가 참 열일 했구나 싶다.
환상, 도취. 때때로 이것들은 존재에 의미를 부여해 준다.
p184 " 내가 작가라는 것이 분명해진 것이다. 날 때부터 그랬고 영원히 그럴 것이다. 그러나 어떤 불안이 이와 같은 흥분을 좀먹는 때가 있었다. 할아버지가 보증해 준 것으로 믿었던 그 재주가 단순히 우연이라고 생각하기는 싫었다. 나는 그것이 하나의 사명이라고 치부하기에 이르렀다. "
작가라는 직업이 자신의 존재 이유이자 천직으로서 그는 문학이 인류 전체를 지키는 성직자의 역할을 한다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양차 대전의 경험 속에서 문학은 배고픈 이들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없음을 알게 된다. 그는 자기의 존재가 우연히 던져진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는 대신 문학에 절대성을 부여해 존재의 정당성을 획득하려 했다. 그의 철학에 따르면 이것은 자기기만이다. 우연히 던져진 존재임을 받아들이고 그 자유를 감당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필연적으로 주어진 존재는 없다. 따라서 존재의 이유에 대한 물음은 허무하다. 자신이 불안 속에 당당히 서서 창조적으로 주체를 만들어가는 과정만 있을 뿐이다.
'말'이라는 책으로 이듬해 노벨문학상에 선정됐으나 거절한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문학과 멋지게 이별하기 위해 가장 멋있는 문체로 오랫동안 수정하고 수정해서 이토록 매력적인 작품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p269 "시간을 거꾸로 본 환상은 산산조각으로 부서졌다. 순교, 구원, 불후의 명성 등 모든 것이 결단 나고, 대궐은 무너져서 폐허가 되고 말았다. 나는 성령을 지하 굴에서 붙들어 몰아내 버렸다. 무신론은 가혹하고도 오랜 시일이 걸리는 작업이다. 나는 그 작업을 끝까지 밀고 나갔다고 자부한다."
문학이라는 신경증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을 끝까지 밀어붙이며 분석했던 그의 허망함, 쓸쓸함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나도 책과 철학을 통해 나 자신을 분석하면서 그와 같은 씁쓸함을 느꼈었다. 꽃이라는 대상에 도취되고, 돈이라는 환상으로 나를 우뚝 세우겠다는 욕망을 읽었을 때 나는 깊은 수취심에 떨었다.
'돈'이라는 신성, 절대성이 지배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나 또한 거꾸로 된 환상과 아름다움을 쫓아왔다.
지금 양평 시골마을로 이주하고 거리가 멀어진 탓도 있지만 1년 정도는 꽃시장에서 갈 수 없었고, 꽃을 팔겠다는 마음도 사그라들었다. 이제 나를 매혹하던 꽃향기는 흩어지고 희미해졌다. 이런 나의 마음을 아시는 분이 굉장히 조심스럽게 꽃을 의뢰했을 때, 작업하고 선물로 드린 적도 있었다. 언젠가 필요하면 경제활동을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나의 존재 이유나 목적으로 삼지는 않을 것이다. 이제 나의 과업, 진정한 아름다움을 찾아가리라. 노년에 가까워져도 변신하고 진보했던 사르트르처럼 탈피한 나의 허물은 미련 없이 벗어던지리라.
내가 사는 이 세상은 도대체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일까? 다음은 기드보르의 '스펙터클의 사회'를 통해 내가 사는 세상에 대해 다시 되새김질을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