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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트 Feb 15. 2024

무능이 어때서요?

스펙타클의 사회 / 기 드보르

"노동이나 권태 따위는 지옥으로나 가라!" 


상황주의 인터내셔널에게 혁명은 일상적 삶의 재창안이었다. 그들은 세계에 대한 지각과 관계를 변형시키는 것이 사회 구조를 변화시키는 것과 동일하다고 생각했다. 때문에 사람들이 상투적인 사고방식과 행위양식으로부터 탈주하도록 일상적이고 상식적인 것들을 뒤흔들어 버릴 상황들을 구성하고 시도했다. 


지극히 소비자본주의적인 일상의 공간을 혁명적 실천의 장으로 구축하여 상상력이 권력을 장악하고 모든 이들이 시와 예술을 창작하게 되기를 원했다. 그들의 운동은 프랑스 68 혁명의 기폭제가 되었고 적극 개입했는데 정치적으로 마르크스주의를, 예술적으로는 다다이즘을 비판적으로 계승해 전위적 운동을 펼쳤다. 



am 3:00 소란을 먹고사는 도시가 어둠 속에 침잠하는 시간. 택시를 호출해 집으로 향한다. 성수대교를 건너며 바라보는 노란 가로등은 가우시안 블러를 한 듯 뿌옇다. 집에 도착하면 씻고 애써 각성시켰던 몸을 누이며 몇 시간이라도 잠을 청해야 한다. 나에게 주어진 자유의 시간은 약 4시간.


am 8:00 새벽보다 더 무거운 몸으로 일어나 서둘러 출근준비를 마치고 회사로 향한다. 


am 10:00 다시 회사 도착. 믹스커피를 한잔 타놓고 이제 모니터 앞에서 약 14시간 밥 먹고 화장실 가는 시간을 빼고 작업을 한다. 그렇게 프로젝트가 끝날 때까지 같은 패턴으로 주말도 없이 일을 한다. 그러나 누가 강제로 시킨 일은 아니다. 나는 돈이 필요하고 그들은 나의 시간과 기술(디자인)이 필요해서 교환했을 뿐이다. 


월급 받는 날 쇼핑할 시간도 없어서 온라인으로 필요한 상품들을 장바구니에 담고 당당하게 결제한다. (이 맛에 일하는 거지!)라고 생각하며. 그렇게 웹에이젼시에 소속되기도 하고 프리랜서로 일 하기도 하며 햇수로 10년 정도 일을 했다. 


서른이 다가올수록 이렇게 일하면서 아이를 갖기는 힘들겠다는 막연한 위기감을 느꼈다. 나는 사회구성원으로서 필요한 사람이 되든지, 아이를 만날 준비를 하든지를 선택해야 했다. 근무시간이 일정하지 않고 야근이 많은 직업인터라 둘 다 병행하기는 무리였다. 후자를 선택하고 불임크리닉에 다닌 지 몇 달 만에 임신에 성공하고 사랑스러운 아이를 만나게 되었다. 


애초에 계획은 일 년 정도 아이를 키우다가 친정 엄마께 맡기고 일에 다시 복귀할 생각이었다. 그때 우리는 작은집 전세에 사는 형편이었고 맞벌이는 필수인 듯싶었다. 그러나 4살 가까이 되어도 아이를 맡기고 차마 일을 나갈 수가 없었다. 내가 좋은 엄마였는지는 모르겠으나, 아이 옆에 있고 싶었고 잔병치레하는 아이를 나이 든 부모님께 맡기는 것도 못할 짓 같았다. 일은 그렇게 되었고 시간은 흘러갔다. 엄마가 된 나는 왜 무능하고 쓸모없는 존재같이 느껴졌을까? 도대체 나는 어떤 세상에 살고 있는 걸까?


p24. " 노동자는 자신을 생산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일종의 독립적인 힘을 생산한다. 이 생산의 성공, 그것의 풍요는 생산자에게 박탈의 풍요로서 되돌아온다. 그의 세계의 모든 시간과 공간은 그의 소외된 생산물의 축적으로 인해 그에게는 소원한 것이 된다.

자신의 생산물로부터 분리된 채, 인간 자신은 그의 세계의 모든 세부사항들을 한창 증대된 힘으로 생산하며, 그리하여 자신의 세계로부터 한층 더 분리된다. 그의 삶이 이제 그의 생산물로 되면 될수록, 그는 자신의 삶으로부터 더욱더 분리된다. "


원시경제에서 상품은 잉여 생필품을 뜻했다. 그 여분의 것을 교환하는 형태로서 교환가치는 사용가치의 담지자 역할을 했다. 그러나 산업혁명을 통한 대량생산과 분업 그리고 자본의 축적 가능함으로 상품은 마침내 삶을 지배하게 되는 막강한 권력을 쥐게 된다. 상품의 형태로 나타난 경제적 힘의 확장은 인간노동을 상품노동으로 즉, 임노동으로 변형시켰고 마침내 지속적인 생산으로 풍요에 이르게 되었다. 


소비 자본주의에서 삶은 스펙타클로 환원되었다. 

공장이나 회사에서 소외된 생산 활동을 했던 노동자들은 이제 그들의 소외를 보충하기 위해 소외된 소비를 하게 된다. 한때 노동자는 생산자로서 멸시를 받아왔지만 이제 소비자라는 미명하에 자신의 시간을 팔아 지급받은 돈을 주고 상품을 구매한다. 백화점 또는 상점의 점원은 대접받아 마땅한 사람으로서 그를 유혹한다. (물론 그의 지갑만 두둑하다면!) 그는 노동자에서 소비자로 호명되어 그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한다. 그리하여 노동자는 자신을 의식하지 못한 채 사이비 순환적 시간 속에 살아간다.

밤과 낮, 노동과 주말휴식, 휴가의 정기적 반복. 반복. 반복. 인간의 가능함은 이것의 순환이다.


P32. " 소외된 소비는 대중들에게 소외된 생산을 보충하는 일종의 의무가 된다. 다름 아니라 바로 사회의 모든 판매된 노동이 전지구적으로 총체적 상품이 되며, 이를 위한 순환은 계속되어야만 한다. "


스펙타클은 사람들의 만족을 고유한 법칙에 따라 상품과 동일시하게 만들었다. 그의 가능함은 상품을 구매하는 능력이고 상품은 결핍을 포함하고 있다. 이제 자본주의는 상품의 증가 속에서 새로운 결핍의 형태를 발전시킨다. 따라서 이 새로운 결핍은 사람들이 임노동자로서 임금획득을 위해 끊임없이 노동을 추구하게 만든다. 


p126. " 시간은 모든 것이다. 인간은 아무것도 아니다. 인간은 기껏해야 시간의 잔해이다. " (철학의 빈곤)


결국 내가 막연히 원했던 것은 내 존재의 시간의 한 축을 떼어 그들에게 내어주고 그 거대한 기계에 하나의 부품으로 들어가고 싶었던 것이다. 거기서는 아이의 웃음소리와 멀어져야 한다. '사랑'은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이렇게 나 자신의 무지와 물려받은 가치에 대한 감각은 내 삶의 소중한 시간들을 분열시키고 곁눈질하게 만들었다.


기드보르의 문장을 통해 마르크스를 만나고 헤겔을 만났을 때 나는 많이 아팠다. 책을 읽으면서 한 서너 번 정도 서럽게 울었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아포리즘적으로 짤막하게 요약한 문장들은 날카로웠고 살아있었기에 내 상상력을 자극했다. 평생을 노동자로 사신 내 부모님과, 나 , 그리고 자라 가는 나의 아이. 우리의 모습이 상상되었기 때문이다. 


파네지릭에서 그는 말한다. P17 "나는 동시대 사람들이 받아들인 가치를 단 한 번도 믿은 적이 없다." 

조금 삐딱하게 서서 비판적으로 계속 세상을 읽어보려 한다. 그리고 내 삶의 각도를 조금씩이라도 틀어 나아가리라. 두발 후퇴하더라도 매일 한보씩이라도. 무능이라 불러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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