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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트 Jul 22. 2024

딱새와 다람쥐는 흔들리지 않아요.

 정신현상학 / 헤겔


길을 걷다 묻는다. '나 잘 살고 있는 거 맞아?' 이마에는 땀이 맺히고 나무들 사이로 새들의 지저귐이 들려온다. 여름인데 이 무슨 가을의 센티함인지. 갑자기 울컥하는 마음이 든다. 40대 대부분의 시간을 불안 속에 흔들리며 아파하며 보냈다 생각하니 문득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가위로 오려낼 수만 있다면 내 삶의 미운 부분들을 오려내 버리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 그렇게 어느 여름날 무거운 마음으로 보내다가, 문득 되새김질하고 있는 헤겔의 문장이 떠올랐다. '진리는 전체다.'


정원에 종종 놀러 오는 '딱새'와 '다람쥐'는 분열이 없는 즉자의 존재이다. 이는 자신을 의식하지 않고 그저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상태를 말한다.

반면 인간은 대자적 존재로 자신과 타자를 구분하고 자신의 존재를 의식한다. 이 과정에서 인간은 자신을 객관화하여 바라보며, 자신의 본질과 존재 의미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한다.

정신의 존재양식인 의식은 지(인식)와 대상이라는 두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 지와 대상이 일치하는 지점이 바로 진리이다. 정신현상학은 점진적으로 진리를 향해 나아가는 정신의 도정을 그려낸 책이다. 


p55  진리는 곧 전체이다 "  

라는 문장은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이것은 진리가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전개를 통해 스스로 발전해 나아감을 뜻한다. 이 과정에서 분열, 대립, 모순, 소외는 필연이다. 는 모든 전개 과정마다 이러한 요소들을 통해 진리를 적극적으로 획득해 나아가기 때문이다.

여기서 정신이 힘을 발휘하는 이유는 부정적인 것을 외면하지 않고 그 곁에 머무르기 때문이다. 그것을 피하지 않고 직면할 때 그 부정의 것이 존재로 전화되는 힘이 생겨나는 것이다. 그것이 주체이다. 부정이나 매개를 자기 외부에 방치한 무기력한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분열과 매개를 행하는 존재만이 주체라고 불릴 수 있는 것이다.


p71 " 정신이란 그 자신이 절대적인 분열 속에 몸담고 있음을 알아차리는 가운데 진리를 획득하는 것이다 " 


진리는 '신' '절대적인 것'이라는 낱말의 어떤 표상이나 무의미한 소리로서의 이름이 아니다. 험한 산을 오르듯 자갈길을 밟고 냇가를 건너 모험을 하며 나아가는 모든 여정 속에서 쟁취하는 것이다. 발이 아프다고 건너지 않을 수도 없고, 물에 젖는다고 포기할 수도 없는 역경의 길일 수도 있다. 그 과정 과정을 다 거치고 나서야 탁 트인 시야와 함께 진리라는 정상에 오를 수 있는 것이다. 


인생의 여정도 마찬가지 아닐까? 시작도 끝도 아닌 모든 지금, 지금들이 모여서 전체로서의 삶의 무늬를 만들어가기 때문이다. 뜻대로 되지 않았다고, 넘어졌다고, 또는 밉다고 오려서 버려버릴 수 없는 것이다. '딱새'나 '다람쥐'에게는 흔들림이 없다. 그들은 의식하는 존재가 아니기에 분열도 소외도 발전도 없다. 그러나 인간에게 소외는 선택사항이 아니다. 인간이 의식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생이라는 여정에서 우리는 성공과 실패를 반복하며 성장해 나간다. 어떤 부정의 것도 과정과 경험으로서 이해하고 받아들일 때 그대로 우리의 삶을 긍정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 생략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라고 말한 철학쌤의 말이 이제야 마음으로 다가왔다. 못생기고 아파도 생략할 것 없는 그 소중한 시간들과 삶. 그 시간들을 버티고 지나갔기에 오늘이, 지금이 있고 또 내일을 그릴 수 있는 것이다. 


초여름의 나의 생각은 여름이 무르익으면서 변했다. 그때 나의 물음에는 개인으로서의 '나'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그러나 '너'가 없다면 '당신'이 없다면 '나'의 삶도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타인은 아이일 수도 있고, 남편일 수도, 친구일 수도 또 남모를 누군가 일수도 있다. '나'만을 생각하는 삶은 허무하다. 그러니 관계를 위해 애쓴 나의 시간과 고통은 그 무늬가 아름답지 않다 하여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헤겔의 '진리는 전체다'라는 말을 되새기며 깨닫는다. 완벽해 보이는 삶이 아니라 모순과 고난을 포함한 전체로서의 삶이 진정한 의미를 지닌다는 것을. 내 삶의 여정에서 마주친 모든 순간순간들이 나를 만들어왔음을 이제 안다. 다시 묻는다. " 나 잘 살고 있는 거 맞아? " 이번에는 확신으로 대답한다. " 그래, 잘 살고 있어. " 이것은 또다시 흔들리지 않을 선언이 되어줄 것이다.


헤겔의 철학은 완벽함 대신 전체성을, 대립을 넘어 성장을, 개인의 만족이 아닌 관계 속의 의미를 추구하는 삶의 지혜로 나를 이끌어 주었다. 이제 나는 내 삶의 모든 순간이, 아름답든 그렇지 않든 모두 소중하다는 것을 알겠다. 이 모든 것이 합쳐져 내 삶의 '전체'를 이루며, 나만의 고유한 무늬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 정신현상학을 몇 년 전 약 일 년에 걸쳐서 완독하고 요즘 1권을 다시 되새김질했어요. 1권도 몇 달에 걸쳐 읽다 보니 브런치에 올릴 글이 없어서 이렇게 오랜만에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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