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담과 무의식의 관계 / 프로이트
니체는 인간의 내면을 굴로 비유하였다. 이는 인간 내면의 모호함과 복잡 미묘함을 말하는 것이다.
'역겹다'는 표현은 질투, 분노, 미움 같은 우리가 마주하기 꺼리는 감정들을 나타낸다. '미끌미끌하다'는 것은 이러한 내면의 요소들이 파악하거나 통제하기 어려움을 의미한다. 이해하기 힘든 우리의 감정과 충동은 마치 바닷속 뿌연 침전물처럼 우리 의식의 깊은 곳에 가라앉아, 그 실체를 명확히 파악하기 어렵게 만든다.
타인을 만날 때도 마찬가지다. 그들의 표정, 몸짓, 말의 울림에 주목하지만, 그 이면에 숨겨진 생각과 감정을 헤아리기는 어렵다. 이는 우리가 자주 타인의 말이나 행동을 오해하게 되는 이유이기도 한다. 만약 굴과 같은 우리의 내면을 모두 드러낸다면, 인간관계는 어떻게 될까? 아마도 관계는 금방 절단 나고 우리 사회는 동물의 세계만큼이나 거칠어질 것이다.
그렇다면 이 파악하기 힘든 내면세계를 들여다볼 방법은 없을까? 프로이트는 우리의 깊은 무의식을 탐구하기 위해 '꿈'의 언어를 해독하는 데 주목했다. 꿈이라는 창을 통해 의식의 표면 아래 숨겨진 욕망과 두려움, 그리고 억압된 충동들을 엿볼 수 있다. 이는 마치 어두운 바닷속을 탐험하는 것과도 같아, 우리 자신의 미지의 영역을 밝히는 여정이 된다. 꿈이 밤의 어둠 속에서 속삭이는 무의식의 언어라면, 농담은 일상의 빛 아래에서 춤추는 우리 내면의 목소리다.
프로이트의 관점에서 농담은 단순한 유희에만 머물지 않는다. 그에 따르면, 농담은 무의식적 욕구와 생각을 간접적으로 표현해 심리적 에너지(억제, 억압)를 해방시키고 즐거움을 방출하는 언어적 메커니즘이다.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자. 농담은 의도에 따라 분류할 수 있다. 농담은 아무 목적이 없는 악의 없는 농담과 경향성(의도적 목적을 지닌) 농담으로 나뉜다. 전자가 단순히 웃음을 유발하는 것이 목적인 반면 후자의 경우 특정한 의도나 목적을 지닌다. 경향성 농담의 종류는 외설적, 공격적, 냉소적, 회의적 농담이 있다. 이 중 외설적, 공격적 농담을 살펴보자.
프로이트는 외설적 농담에 속하는 음담패설이 여성을 겨냥한 유혹의 시도와 비슷하다고 한다. 과거에는 원초적 욕구를 즉각적으로 표출할 수 있었다면, 문명화 이후의 사회에서는 이러한 충동을 억제해야만 한다. 그러나 인간의 심성에서 전면적인 포기는 어려워서, 경향성 농담이 그것을 대체하는 수단으로 사용된다.
결국 음담패설은 성적인 것을 발가벗긴 채 구경하는 즐거움이 그 동기이다.
공격적 농담도 외설적 농담과 유사한 심리적 메커니즘을 가지고 있다. 문명화된 사회에서 이웃이나 낯선 이에 대한 직접적인 적대감의 표출은 사실상 힘들다. 이로 인해 사람들은 직접적인 공격 대신 농담이라는 간접적인 형태를 통해 공격적 충동을 표현하고 해소하려 한다. 때문에 농담은 사회적으로 용인될 수 있는 비방의 수단이 되며, 공격자는 '단순한 농담'이라는 변명 뒤에 숨을 수 있게 된다. 결과적으로 공격적 농담은 억압된 적대감을 우회적으로 표현하는 심리적 출구 역할을 하게 된다.
이와 같이 프로이트는 무의식 탐구의 영역을 학문에 국한하지 않고 일상생활로 확장하고자 했다. 그가 꿈 해석뿐만 아니라 농담과 같은 일상적 현상까지 연구 대상으로 삼은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의 이론은 우리가 표현하는 표면적인 말들, 특히 상처나 오해를 일으키는 말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게 해주는 도구가 되어주기도 한다.
이러한 프로이트의 통찰은 우리의 일상생활에 직접적으로 적용될 수 있다. 실제로 나는 그의 이론을 바탕으로 오랫동안 이해할 수 없었던 어떤 말을 새롭게 해석할 수 있었다. 내 여동생 J가 나에 대해 한 농담이 그것이다.
몇 년 전 개인적으로 힘든 일이 있어서, 제주도로 아이와 한 달 살기를 계획하고 있었다. 내가 일이 있어서 불참한 가족모임에서 누군가 “우리도 제주도 갈까요?”라는 말을 던졌다고 한다. 그때 j가 웃으면서 “ 그 여자 얼굴 보고 앉아서 뭐 해? “라는 농담을 하고 다 같이 웃었다고 한다.
그 말을 전해 들었을 때, 가슴이 서늘해 나는 웃을 수 없었다. 그 당시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가족의 온기였으나, 그 농담은 소외라는 감정을 여실히 느끼게 해 주었다. J의 농담은 우리의 관계를 부정하는 듯 보였고, 나라는 사람이 그 정도로 별로인 존재인가?라는 생각에 빠져들게 했다.
그 후로 J와의 관계는 소원해졌다. 나는 그녀의 말속에 담긴 적의를 이해할 수 없었고, 그녀가 관계 회복을 원할 때도 마음을 열지 못했다. 그 말은 내 마음 한구석에 가시처럼 박혀 있었다.
하지만 지금, 프로이트의 이론을 통해 그 농담을 다시 바라보니, 새로운 해석이 가능해졌다. J의 농담은 단순한 적의가 아닌, 복잡한 감정의 표출이었을지 모른다. 이는 앞서 본 전형적인 공격적 농담의 예시로, J의 복잡한 내면을 드러내는 표현이다.
프로이트의 관점에서 볼 때, J의 농담은 억압된 감정의 우회적 표현이다.
J가 언젠가 부모보다 나에게 더 강한 애착을 느낀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이 말을 통해 그녀가 나에 대해 사랑과 미움을 포함한 복잡한 감정을 가지고 있음을 추측할 수 있다. J는 직접적인 반감의 표현 대신 농담의 형태를 취함으로써, 사회적으로 용인될 수 있는 방식으로 자신의 적대감을 표현했다. 이 가벼운 농담을 통해 자신의 억제된 감정(예: 질투, 분노, 두려움)을 해소하고자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억압에 들어가는 심리적 에너지를 절약하고 쾌감을 얻고자 함이다.
이러한 프로이트적 해석을 통해, J의 농담은 단순한 악의가 아닌, 그녀의 내면에 있는 '미끌미끌한 굴'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는 그녀가 나를 향해 가진 사랑, 질투, 분노, 그리고 아마도 두려움까지 포함한 복합적인 감정들을 '응축'하여 표현한 것으로 해석된다.
이제 생각해 보니 '그 여자', '얼굴 보고 뭐 해' 등의 표현도 마치 사춘기 아이의 반어적 화법처럼 들린다. 이 말에는 거리를 두고 싶은 마음과 동시에 관심과 애정을 바라는 마음이 뒤섞여 있다. 사랑과 미움, 그 둘의 거리는 생각보다 멀지 않다. 우리는 종종 이런 양가감정에 스스로도 당황하며 혼란에 빠진다.
솔직히 책을 읽기 전 그녀의 농담과 함께 그 당시의 기분이 떠올라 그녀에 대한 적대감이 생생했다. 그러나 읽은 내용을 정리하고 글을 쓰면서 나 자신의 마음과 그녀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정리하는 계기가 되었다. 오랫동안 응어리져 있던 불편함과 배신감이 바로 사라졌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러한 해석을 통해 이해하는 마음은 얻을 수 있었다. 이해가 곧 용서는 아니지만, 적어도 그 첫걸음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나 역시 누군가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농담을 했을 것이다. 니체가 말했듯 인간의 내면은 "미끌미끌한 굴"과 같기 때문이다. 농담의 즐거움은 절약된 억제 비용에서 나온다고 프로이트는 말한다. 그러나 관계의 소중함을 생각해 보면, 어떤 말은 차라리 뱉지 않는 편이 나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일시적 감정의 해소보다 더 큰 비용을 지불해야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J와의 관계가 틀어진 것처럼 말이다.
지금 나는 어쩌면 j와의 관계 회복을 바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시간이 더 필요할 수도 있다. 그 과정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다. 다만 이제 비로소 시작되는 가을, 따뜻하고 포근한 말들을 그리워하며. 같이 웃을 수 있는 날들을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