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 선데이 에세이 주제는 '어린이'였습니다. 개인적으로 힘든 시련이 있었던 고난의 주간이 끝나고 난 뒤 다른 때보다 생각이 더 많아진 것인지, 아니면 아무런 생각이 안 나는 것인지 바로 글을 쓰지 못하고 한참 생각에 잠겨 있었습니다. 최근에 미성숙한 '내면 아이'를 만났기에 이 주제가 더 어렵고 두려웠던 것 같습니다. 왜 나조차 어린이를 '성숙하지 못한 존재'로 바라보는지 그 실마리를 찾아 글쓰기 여정을 떠나봅니다.
나는 '어린이'라는 단어를 좋아한다. 부르는 발음에서부터 따뜻함이 묻어난다. 자음보다는 모음의 조합이 동글동글하게 더 잘 들려서 그런 것 같다. '어린이'를 겪지 않고 성인이 되는 사람은 없다. 새싹의 과정을 생략하고 성장한 식물이 없듯이 만물이 다 그러하다. 5월 5일은 나의 양력 생일이기도 하다. 어린이날에 태어났으니 평생 어린이로 있어도 좋다는 삼신할머니의 허락을 받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때는 했었다. 피터 팬처럼. 하지만 어느 순간 나는 빨리 자라 어른이 되고 싶었다. '어른만 되면, 어른만 되면...'하고 되뇌었었다. 그런데 어른이 되었는데도 그리 기쁘지가 않았다. 자유롭지도 않았다. 오히려 순수했고 아무런 걱정이 없었다고 기억되는 어린 시절이 그리웠다. 그 시기가 그리운 것을 보면, 어린 시절의 기억이 한 사람의 일생을 살아가는 데 매우 중요한 메시지가 되는 것은 분명하다. 모두가 행복한 어린 시절만 있었던 것은 아니므로. 어찌 보면 이 '어린이'는 지금과 뚝 떨어진 과거의 내가 아니라 평생 '나'에게 기거하며 함께 숨 쉬고 살아가는 또 다른 나이기도 하고, 고향 같은 곳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넌 어른이야'라고 다들 말해주는 나이가 되고부터는 왠지 모를 불안과 허탈감이 찾아왔다. 어쩌면 사회적으로 선보여야 하는 '어른'이라는 옷을 입고 어른의 연기를 하며 지금까지 살아온 것일지도 모른다. 결혼하고 아이가 태어나고 나서부터는 집에서조차 어른의 옷을 벗을 수 없어 답답했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나와 비슷한 얼굴과 성격을 가지고 태어난 자녀에게서 어린 시절의 나를 발견하고부터 나는 자연스럽게 다시 어린아이가 되었다. 자녀를 키우며 어린 시절의 나를 만났다. 내가 해보지 못했던 일, 갖지 못했던 많은 것들을 선물하며 함께 기뻐하고 웃었다. 심지어 울기도 했다. 그러면서 나의 '어린이'도 다독여 주었다. 그렇게 내면 아이는 자녀와 함께 성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딸이 사춘기의 절정에 이르면서 그 모습을 받아들이기 너무 힘든 시기가 찾아왔다. 어른의 말을 거스르지 않고 말 잘 듣던 딸로 살아온 나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그녀의 행동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내가 억눌러놓았던 그 무언가가, 모범생 딸이 되기 위해 포기했던 자유분방함이 내 딸에게서 발현되는 것이 아니냐는 생각이 들었다. 이 생각이 들고 난 이후로는 자연스럽게 발산하는 그 시기의 에너지를 용인해 줄 수 있게 되었다. 바다와 같은 마음을 가진 부모를 만난 딸이 부럽기도 했다. 그러면서 나는 다시 나의 어린이를 살피고 스스로 물었다.
"어렸을 때 채워지지 못한 너의 욕구가, 살면서 너를 힘들게 했니?"
"어린이로서 누려야 할 천진난만한 자유를 다 누려보지 못한 것이 후회되니?"
스스로 대답하는 소리가 들렸다.
"괜찮아. 이젠 너는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는 어른이 되었어."
"네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해보고 살아."
마지막 말은 사실 남편이 나에게 해 준 말이기도 하다.
그냥 그 말이, 마음대로 하고 살아도 된다는 그 말이 그렇게 위로가 될 수가 없었다.
피카소는
'라파엘로처럼 그림을 그리기까지는 4년이 걸렸지만, 어린아이처럼 그리는 데는 평생이 걸렸다'라고 말했다.
비록 화가가 되기를 포기한 나지만 어른이라는 노련함보다는 정제되지 않은 순수함을 가진 어린이로 남고 싶다는 소망은 피카소와 별반 다르지 않다. 나는 이렇게 어린 아이가 되기로 했다.
어떤 주제에 대해 사유할 시간을 갖는 것은 참 좋습니다. '주제'라는 것이 강제적으로 주어질 때 우연한 사고의 성장이 더 일어나는 것 같습니다. 오늘 시댁에 가셨음에도 불구하고 모임을 이끌어 주신 윤미영 팀장님께 감사함을 전합니다. 죄책감을 드러낸 나의 내면 아이가 아닌 밝고 쾌활한 모든 해도 되고 할 수 있는 나의 어린이를 만나게 해 주심에 더더욱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