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 선데이 에세이 주제는 '장소'였어요. 우리는 일생동안 여러 장소에서 살아가지요. 사전적인 장소의 의미는 어떤 일이 이루어지거나 일어나는 곳이라지만 그냥 우리가 존재하는 그곳이 모두 장소이므로 존재와 장소는 불가분의 관계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은 추억의 장소이면서 현재의 공간이고, 미래의 장소로 이어지는 우리 가족만의 장소를 소개해 볼까 합니다.
차가 없던 남자 친구는 나와 결혼을 해보겠다고 중고차를 샀다. 버스, 지하철, 마을버스를 번갈아 타고 출근하던 나에게 어떻게든 환심을 사고 싶은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실제 차를 직접 몰아본 적이 없고 운전 연수도 한 번 받아보지 못한 초보자는 벌벌 떨리는 두려움을 숨긴 채 여자 친구의 집과 직장을 오고 가며 그녀를 태워 나르기에 바빴다. 그 중고차를 타고 처음으로 데이트하러 간 곳은 파주 헤이리 예술인 마을이었다. 우리는 마을 여기저기를 걷다가 아주 독특하고 멋있는 나무 하나를 발견했다. 겨울이어서였을까? 녹음이 짙을 땐 볼 수 없었던 나뭇가지의 본래 모습이, 그 외모에서 풍기는 매력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나무는 나이 500살, 품종은 느티나무라는 안내판으로 자신을 소개했다. 마을의 구석진 외곽이라 어쩌면 만나지 못했을 그 나무를 발견하고 우리는 행복해졌고, 나무 앞에서 서로의 모습을 찍어주었다. 스마트폰이 나오기 전이라 카메라 셀프 촬영 기능이 없었고, 추운 겨울에 지나가는 사람마저 없는 그런 외진 길이었다. 누가 먼저 말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결혼해서 아이가 생기게 되면 이 나무에 다시 오자는 약속을 하고 돌아왔다. 그 후 우리는 어떻게 되었을까?
나에게 오만 정성을 다 쏟은 남자 친구는 결혼에 성공했고, 나의 남편이 되었다. 결혼 후 얼마 안 있어 아이가 생겼다. 그리고 연애 시절의 약속을 떠올리며 뱃속의 아기와 함께 우리는 다시 그 느티나무를 찾았다. 겨울의 모습과 달리 잎이 풍성해진 느티나무는 나와 남편과 뱃속의 태아를 두 팔 벌려 반겨주었다. 큰마음먹고 장만한 디지털 수동 카메라와 삼각대를 설치하고 우리는 첫 가족사진을 찍었다. 2007년, 이렇게 시작되었다. 매년 느티나무를 찾아가 기념사진을 찍는 연례행사가.
아들이 태어났을 때는 세 명이, 딸이 태어나서는 네 명의 완전체가 되어 해마다 이 장소를 찾아가 가족사진을 찍었다. 오백 살 된 느티나무에게는 우리와 나무만 아는 '가족나무'라는 이름이 생겼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김밥을 싸 들고 느티나무 아래로 소풍을 가서 먹기도 하고, 눈이 오던 날은 나무 밑에서 눈싸움하며 놀기도 했다. 일 년에 한 번 정도만 찾아가는 장소였기에 한 뼘은 자란 아이들과 한 뼘은 늙은 부부의 이야기가 사진에 고스란히 담겼다. 연애 시절부터 2018년까지 찍은 사진으로 첫 앨범을 만들었다. 한 장 한 장 넘기며 만나는 가족의 성장을 사진으로 마주하며 눈시울이 붉어졌다. 헤이리에 있는 가족나무와의 인연은 이렇게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언젠가는 두 번째 앨범이 만들어질 것이고, 세 번째 앨범이 만들어질 때쯤 대가족이 이 나무 아래에 모여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아이들에게 집이 아닌 우리 가족만의 장소를 선물하고 싶었다. 부부가 죽고 없어진 이후에도 찾아와 추억에 젖을 장소 하나쯤은 유산으로 남겨주는 것도 좋은 일이 아닐까. 카카오스토리에 올렸던 2013년, 2016년의 짧은 일기를 공유해 본다.
2013. 08. 18.
올여름방학은 해마다 하는 가족사진 찍기로 마무리했다. 6장의 사진은 비록 적은 수이지만 6년이란 세월이 압축되어 있어 숫자로는 전할 수 없는 소중함이 담겨 있는 우리의 가족사이다. 아이들이 컸을 때 왜 이런 행사를 하는 거죠?라고 물을 때 그동안 찍어 둔 앨범을 꺼내 보여 주며 대답을 아낀다면 그들도 이해할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우리 부부가 이 세상에 없는 그날이 오더라도 이 가족나무 앞에 와서 추억에 젖으리라! 부모의 무덤 앞에 있을 때와는 또 다른 삶의 가르침을 떠올리며 그들도 각자의 유쾌한 가족사를 만들어 가겠지.....
2014. 06. 15.
헤이리 가족나무에 다녀왔다. 올해는 J가 주도하여 사진마다 갖가지 콘셉트로 찍었다. 전통 포즈, 하트 포즈, 파이팅 포즈 등등.. 요즘 들어 자신의 의지대로 하고자 하는 것이 많아진 J.. 때론 컸나 싶어 반갑기도 하고, 때론 당황스럽기도 하다. 성장하는 과정 내내 참 많은 것을 배우고 느끼게 해주는 육아라는 숙제 참 어렵다.
E가 질문한다.
"엄마 내년에 여기 오면 나 몇 살이야?"
"7살 되지..."
"그때는 훨씬 더 많이 커 있겠네.
"그럼."
1년 사이에 훌쩍 큰 남매... 내년에는 또 어떤 변화를 느끼며 이곳에 찾아오게 될는지...
우리 가족의 장소이자 사물인 헤이리 느티나무는 추억의 장소로만 끝나지 않는다. 현재진행형 속의 공간이고, 미래진행형 속에 존재하는 공간이 될 것이다. 오백 년 동안 이 땅의 모든 고난과 역경과 즐거움을 지켜봤듯이 늘 그 자리, 그 장소에서 인간들의 삶을 바라보고 품어줄 것이다. 우리가 자연을 보호하고 지켜야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장소에 대한 사유는 이렇게 또 과거와 현재를, 그리고 미래를 바라보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