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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아한밍블 Jun 11. 2021

환승역, 나는 선택할 수 있다.

내 인생의 전환점(나도 에세이스트 공모전)

신분당선 강남역에서 2호선으로 갈아탄다. 환승구간은 늘 힘들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강남으로 출근을 하는거냐며, 직주근접을 이루지 못한 사람이 이렇게나 많은거냐며 혼잣말을 하며 걸어갔다. 출근길만 단축되면 이 지긋지긋한 직장도 좀 더 오래 다닐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천천히 간다면 사유의 시간으로 나쁘지 않은데 한가한 생각은 어림없다는듯이 사람들이 몰려온다. 의지와 상관없이 휩쓸려 가고 싶지 않은데...어어? 무표정으로 출근하는 저들과 다르고 싶은데..으으...여지없이 그들과 같이 떠밀려 출근한다.     



매일 같은 시간 저들은 무슨 생각을 하며 환승구간을 지날까? 저마다 각자의 이야기가 있을터인데 '출근하는 사람들' 이라는 카테고리에 넣어 그들의 안녕함을 짐작해 본다. 같은 무리가 되고 싶지 않다면서 자주 같은 무리에 끼어 위안을 삼기도 한다. 저만 힘든 게 아니죠? 다 이렇게 사는거죠? 그들이 어떤 마음으로 출근하는지 알지 못하면서.     


'출근'이 너무 부러웠던 때가 있었다. 취업에 성공하지 못했을 때, 정규직이 아닌 아르바이트 계약직으로 일했을 때, 합격이라는 글자를 보지 못하고 지루한 공부를 계속하고 있었을 때 나는 매일 아침 같은 시간 출근하는 무리를 뉴요커처럼 여겼다. 커피 한잔 들고 다니면 무조건 뉴요커였다. 나도 정규직으로 출근하면 꼭 커피&도넛 가게를 들러야지, 아니지 커피는 스타벅스지 하며 허세 넘치는 출근길을 상상하곤 했다.     


그땐 출근 이후의 삶을 몰랐고 출근이 종착점이라 생각했다. 그 이후는 내 마음대로 되는 줄 알았으니까. 내가 원하는 삶 너머엔 또 다른 이야기가 있고 막상 기대와 다른 모습에 실망할 수 있다는 걸 몰랐다. 출근 이후의 삶을 몰랐듯 다른 가능성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지 않았다. 출근하려고 집에서 나왔으면 환승역을 지나 정해진 직장으로 가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엑셀의 틀 고정처럼 도무지 움직이지 않는 생각이었다.


좌우 움직이지 않던 틀고정은 반복되는 출퇴근길 다른 방향의 '나가는 곳' 표지판을 보며 스르르 해제되었는데 강남역은 환승역이자 나가는 곳이라는 새삼스러운 발견 때문이다.


나가는 곳은 갈아타는 곳과 방향이 다른데...

미련스럽게 그리고 우유부단한 모습으로 출구 방향을 바라본다. 입학-졸업-취업-결혼-육아로 특별한 의문 없이 삶을 이어왔다. 다닐 수 있는 직장이 있어 다행이라고 여전히 수동적인 삶을 살고 있던 내가 다른 가능성을 생각하다니... 보너스 커피를 얻기 위해 부지런히 그리고 성실하게 스탬프를 찍어 왔는데 갑자기 새로운 카페를 가보고 싶은 마음이 생긴 것과 같았다. 다른 곳으로 옮기기엔 모아온 스탬프가 너무 많은데... 라는 생각을 하며 쉽게 경로를 이탈하지 못한다


하지만 마음을 품은 순간부터 주변의 모든 상황이 햇빛, 바람, 양분이 되어 작은 마음을 살뜰히, 조금은 대책없이 키운다. 계획없이 자라난 허둥되는 마음이 무턱대고 앞서나가 조급한 선택을 하지 않도록 오늘의 내가 출구 전략을 세워야한다.


막연히 언젠가는...이라고 생각한 것들이 있다. 직장을 다니고 있다는 사실이 늘 안정감이자 방패가 되어 좀처럼 뚜껑을 열어보지 못한 '언젠가 상자'.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고. 미뤄둔 마음만큼  '나가는 곳'에 눈길을 돌리지 않았다. 매일 지옥철을 타고 좀비 같이 걸어가면서도 이 시간을 견디는 것이 내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가는 곳'을 바라보는 순간 최적 경로에 따르는 것이 아닌 내가 만든 길을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경로를 언제든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출근길 화면이 흑백에서 컬러로 바꼈다. 내가 선택한 출근길이라고 생각하자 감각이 살아난 것이다. 선택할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 생생해졌다.


환승역은 목적지에 편하게 갈 수 있게 연결 된 곳 일뿐이다. 최적경로 검색에서 나온 대로 갈아탈 수 있지만 돌아가더라도 출구로 나가 커피 한잔 마시고 버스를 탈 수도 있는 것이다. 또 누가 아는가? 돌아간 곳이 새로운 기회의 시작이 될지.

 

강남역에서 했던 즐거운 활동을 떠올려본다. 오늘도 나는 신분당선에서 2호선으로 갈아타 출근을 했지만 분갈이 하기 좋은 날, 적당히 자란 마음을 데리고 출구로 나갈 것이다. 새로운 나만의 노선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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