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우아한밍블 Jun 02. 2021

개성 한 방울을 원해

무난하고 평범한 것을 좋아하지만 개성 있고 싶어.

“언니, 제 보물창고 한번 같이 갈래요? 거기 완전 개미지옥. 가면 진짜 눈 돌아가요.”

“그래? 도대체 어딘데?”

“종로에... 흐흐”

“어딘데 그렇게 눈이 돌아갈까? 그래, 한번 같이 가자!”     


‘한번 같이 가자'라는 말은 보통 기약이 없는데 생각보다 빠르게 우리는 날을 잡아 종로 작은 파출소 앞에서 만났다.

후배의 보물창고는 인도에서 생산되는 다양한 패브릭과 소품을 취급하는 편집샵이었다. 인테리어는 평소 관심분야가 아닌 데다 인도에서 나오는 천이라 하면 화려한 나염만이 떠오르기에 큰 기대 없이 만났다. 후배가 즐겨가는 곳이 나에겐 관심 없는 인도 용품점일까 봐 조금 걱정했는데 생각보다 다양한 패브릭이 보기 좋게 진열되어 있었다. 어느 정도 맞장구치며 감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인도와 패브릭, 둘 중 어느 것에도 관심은 없었지만 새로운 것과 보기 좋은 것에는 다행히 관심이 좀 있었으니까.


사람들이 ‘딱 네 취향이다.’ ‘딱 00 스타일’이라고 말하는 것은 무난하고 단정한, 무색무취의 그런 것들이었다. 사실 그건 취향이라기보다는 패션이나 인테리어에 들이는 시간과 노력이 아까워서 늘 대중적인 것을 고르는 흔한 선택이었다. 기존 것과의 조화가 중요했고 사려는 물건의 기능이 우선적인 고려대상이었다. 반면 후배는 하나를 사더라도 자기 마음에 쏙 드는 것을 골랐고 기존 아이템과의 조화나 쓸모 따위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게다가 좀처럼 어디에 쓰는지 알 수 없는 것들을 여기저기 늘어놓았는데 애써 취향템을 사서 안 보이는 곳에 넣어둔다는 게 오히려 이상하다고 했다. 그 아이의 집에 초대를 받았을 때 방의 느낌도 그랬다. 어두운 듯 밝고 정신없는 듯하면서도 자신만의 질서가 있는 느낌이랄까. 어두운 것도 정신없는 것도 숨기지 않는 것이 오히려 건강해 보였다. 무엇보다 자신의 세계가 명확해 보여서 보기 좋았다.

    

우리 집에 오는 사람들은 어떤 반응이었지? 언니답게 깔끔하네, 는 정리를 참 잘한다~는 말을 듣긴 했지만 그냥 정리를 잘할 뿐이지 나의 세계를 보여준 것 같지는 않았다. 나도 나의 세계를 보여주고 싶다는 어린아이 같은 생각을 품었다. 그녀의 방에 있는 특색 있는 소품을 방에 두면 내 방도 다른 세계가 될까? 실용성과 거리가 먼 것들을 사고 싶어 졌다. 실용성 노릇을 하느라 개성이 사라진 것 같으니까. 그런 찰나에 후배가 자신의 보물창고에 같이 가자고 한 것이다. 취향은 다르지만 새로운 세계를 꾸미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탈출! 무미건조한 세계! 조금 신이 났다.


요즘 카페나 SNS에서 보면 예쁜 천 가리개가 많던데 아직 소화가 어려운 소품은 피하고 적당히 포인트가 되는 작은 사이즈의 패브릭을 구경하고 있었다.


“어머!!!!!! 여기 레이스도 있어!!!!!!”


높은 솔의 음으로 소리쳤다. 레이스 커튼이 있다니.(레이스를 사랑한다.) 인도 편집샵에서 새하얀 레이스를 만날 거라는 기대가 없었기 때문인지 더 운명처럼 여겨졌다. 당장 가격을 물었다. 레이스 커튼을 사고 싶어서 인터넷으로 가격을 알아둔 터였고 아르바이트생이 알려준 가격은 합리적인 수준이었다. 갑자기 인도 패브릭에 빗장이 풀린 순간이었다. 후배의 경고대로 '눈 돌아가게' 정신없이 구경을 한 후 레이스 커튼뿐 아니라 연꽃무늬 살구색 커튼까지 샀다. 그리고도 미련이 남아 이것저것 들춰보자 후배가 여기저기 툭 걸치라고 작은 패브릭을 선물해줬다.

    

집에 돌아와 원래 커튼을 치우고 하얀 레이스에 잎이 넓적하고 큰 나무가 있는 커튼을 걸었다. 3월이었는데 여름이 성큼 다가온 느낌이었다. 지금 걸어도 되나? 잠깐 멈칫했다. 사진을 찍어 후배에게 보냈다. 후배의 코치를 받아 다양하게 커튼 위치를 바꾸며 밤늦은 시간까지 조금 행복했다. 연꽃무늬 살구색 커튼은 아직 내 방에서 소화하긴 어렵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내가 원하는 개성 한 방울이 섞인 듯싶어 만족스러웠다. 늘 이렇게 경계에 있는 것. 보통의 무리에 있고 싶으면서도 가끔 튀고 싶은 마음이 내 취향이다. 이런 것도 취향이라고 할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무난하고 평범한데 특별한 무엇이고 싶다. 주변과 조화를 이루는데 돋보여서 쳐다보게 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개성 한 두 방울 더 찾기 위해 다시 그곳을 방문했다. 용도를 알 수 없었지만 후배 말대로 어디든 툭툭 걸치려고 큰 정사각형 사이즈의 패브릭을 사 왔다. 책장 지저분한 곳을 가려야지 하며 여기저기 가려보았는데 당최 마음에 들지 않았다. 테이블 덮개로 해볼까 싶어 또 여기저기 깔아봤다.

하아. 느낌 있게 툭 걸치는 게 안되는데?


개성 한 방울 섞는 게 이렇게 어렵다.

 후배의 취향에 너무 과하게 몰입했나 싶다.

다시 나의 평온함을 찾아 균형을 이뤄야겠다. 덜고 더하고의 반복. 어쩐지 요리 못하는 사람이 소금넣다 설탕넣다 무한 반복인 느낌이 들지만 언젠가 나만의 레시피를 찾으리라!


아쉽지만 내 세계는 아직 건축 중인 걸로-



매거진의 이전글 부정적인 것들도 리듬에 맞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