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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아한밍블 Jun 09. 2021

판교 현백에서 만나!

다섯번째로 좋아하는 장소에 대하여.

       

나의 욕망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욕먹지 않으면서 의미 있게 설명할 수 있을까? 다섯 번째로 좋아하는 장소에 대해 말한다는 것이 이렇게 고민할 일이 될지 몰랐다. 좋아하는 곳은 셀 수 없이 많았고 내가 좋아하는 장소에는 다 의미를 부여할 수 있었으니까. 그런데 하필이면 다섯 번째 장소가 백화점이 될 줄이야. 그것도 ‘판교 현대’ 백화점이라고 특정될 줄은 정말 몰랐다. 어째서 내가 다섯 번째로 좋아하는 장소가 판교 현대백화점인지 설명하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1위부터 4위까지의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다. 다 나의 기준이 있었다고.     


장강명 작가는 ‘책 한번 써봅시다’라는 책에서 첫 번째도 아닌 다섯 번째로 좋아하는 것을 말해보라고 했다. 첫 번째, 두 번째 분명하게 순서를 매기는 과정에서 내가 어디에 가치를 부여하는지 알게 된다고 말했고 장강명 작가가 영화를 이야기했다면 나는 크게 고민하지 않고 ‘장소’를 골랐다. 1위는 몰디브 반얀트리, 2위는 덕성여대, 3위는 담양의 소쇄원, 4위는 삼청동이 뽑혔다. 1위부터 4위까지 모두 할 말이 가득한 데다 어떤 거부감도 없었는데 5위가 백화점이 되는 바람에 나는 구구절절하고 싶은 말이, 다른 의미로 많아졌다.     


몰디브 반얀트리 리조트는 내가 가보지 않은 곳이었다. 몰디브를 신혼여행으로 갔지만, 당시 이런저런 이유로 다른 리조트를 택했고 그곳이 충분히 좋았던 것과 별개로 마지막 후보에서 떨어진 반얀트리 리조트가 늘 생각났다. 다음에 몰디브를 간다면 무조건 반얀트리를 가야지 했기에 1위로 뽑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2위 덕성여대는 나의 모교이다. 손에 잡히는 행복, 적당히 닿을 수 있는 이상과 나의 현실이 조화를 이룬 20대의 장소이자 현재의 장소이기도 하다. 계절마다 생생하게 누린 아름다움과 그 시절의 고민, 깨달음을 잊고 싶지 않아서 졸업 이후에도 일부러 그곳을 찾아가니까. 경험하지 못해서 욕망하는 곳, 경험했기에 더 좋은 곳, 내가 좋아하는 장소의 순위는 그렇게 결을 달리했고 3위와 4위도 그랬다. 나의 취향과 타인의 취향이 번갈아 자리를 잡으며 아름답게 미화된 것이 닮아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장소:: 덕성여대,삼청동 (다 아주 오래된 사진들)



현실과 이상, 나와 타인의 취향이 뒤섞여 순위에 올랐으니 5위가 욕망의 집합소인 백화점이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아니 내가 연주 언니를 어디서 본 줄 알아? 판교 현백에서 장보다 만났잖아.”

“진짜? 난 얼마 전에 거기서 희선이 봤잖아.”     


10대에서 20대를 함께 보낸 동네 언니들을 우연히 만나는 곳. 판교가 딱 우리 동네가 아니었음에도 동네보다 그곳이 우리의 집결지가 되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백화점이 있는 판교의 아파트에 살 수는 없었지만, 소비 정도는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사람, 자산은 그 정도가 되지 않았지만 소득 수준은 크게 차이나지 않는 사람, 그곳에 살지 않았지만 그들과 비교해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했고 정확히 말해 여유롭고 쾌적한 라이프 스타일을 욕망하는 사람이었기에 판교 현대백화점을 좋아했다.     





아이들이 다닌 유치원 생활과도 무관하지 않았다. 선생님들 간식이나 선물을 사갈 때도 초록색 봉투의 현대백화점 쇼핑백에 담겨 있으면 일정 수준의 퀄리티를 보장한다는 생각에 안심됐다. ‘이 정도의 안목이 있는 사람이에요.’ ‘이 정도의 여유가 있는 사람이에요.’ 하는 표시 같았다. 휴직 중 운전을 해서 자주 갈 만한 곳이라는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다. 주차가 어렵지 않고 10분 내로 갈 만한 곳이었으며 책을 볼 수도 브런치를 먹을 수도, 쇼핑을 할 수도 있는 곳이었으니 내겐 최고의 장소였다. 그래, 이곳 역시 현실과 이상이 버무려진 장소였다. 라이프 스타일을 동경할 뿐 실제로 씀씀이가 헤픈 사람이 아니었기에 감당할 수 있었고 먼 길 무리해 가지 않았기 때문에 자주 갈 만했다. 하지만 팩트는 내가 욕망하는 라이프 스타일의 ‘life’를 사는(live) 사람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 점이 씁쓸하지 않다. 그저 ‘Style’을 따라 하는 것이 좋다. 매일의 식료품을 비싼 백화점 식품관에서 사기보다 인터넷 장보기가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고 디자이너 브랜드의 옷보다 나와 비슷한 취향의 인플루언서가 제작한 옷을 선호한다. 정작 동네 사람이 되어 현대백화점의 특별함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보다 내가 이곳에 자주 올 수 있다니, 하며 갈 때마다 새삼스럽게 행복해하는 사람으로 사는 게 더 좋다. 나는 철저하게 현실 속에 사는 사람이다. 가끔 현실을 벗어난 이상을 꿈꾸지만, 현실에서도 제법 행복을 찾을 수 있는 사람. 값비싼 소비에 마음을 뺏기기도 하지만 동네 공원에서도 정신없이 행복할 수 있는 사람.  

   

‘너 허세가 좀 있구나.’ 하는 말을 듣더라도 ‘응 내가 그런 경향이 있어.’ 하며 깔깔 웃을 수 있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

정말이네? 다섯 번째로 좋아하는 것을 쓰다 보니 나를 좀 더 잘 알게 된 것 같다. 지금은 이사를 가서 조금 멀어진 장소이지만 그곳에서 즐거웠던 기억을 떠올리니 다시 행복하다. 혹시 내가 당신에게 판교 현대백화점에서 만나자고 한다면, 그것은 취향을 공유하고 싶다는 관심의 표현임을 미리 알려드리며...


우리 다음에 판교 현백에서 만날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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