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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아한밍블 Jul 17. 2021

무엇이 되기 전, 여름밤

불안하기만 했던 그 시절에 내가 가졌던 것

“치마 색깔이 너무 예뻐요.”

“아, 이 치마... 수술복 색깔 같지 않아요? 초록색을 좋아해서 다양한 초록색을 샀는데 이건 너무 수술복이 생각나요. (웃음)”

“아뇨, 들어오자마자 너무 환하고 상큼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는 이래서 여름이 좋아요. 옷이 가볍잖아요. 색상도 디자인도 다양하게 선택할 수 있고... 겨울은 모두 무채색 옷인 데다 예쁜 옷을 입어도 패딩 벗을 일이 없으니... 어쨌든 여름은 모든 게 가볍고 쨍한 느낌이 들어 덩달아 기분이 좋아져요.”     


나는 우선 여름의 옷 색깔이 다른 계절보다 다양한가 생각했다. 여름이라는 계절이 과감한 디자인과 색감에 관대하긴 하지만 내 여름옷은 흰옷이 더 많은 것 같은데? 하며 그녀의 말에 재빨리 공감하지 못했다. 동시에 그녀에게는 여름이 가볍고 다양한 색깔의 계절로 다가오는구나 싶어 신기했다. 내게 여름은 한 번도 가벼웠던 적이 없던 것 같은데...


불안하면서도 해맑았던, 가끔 그리워지는 여름밤의 기억.

     

한낮은 어려웠다. 겨우겨우 할 일을 마쳤다. 어디선가 늘어져 있다 뜨거운 공기가 한풀 꺾이면 그제야 사람들과 연락을 시도했다. '집에 있어? 산책이나 하자' 동네 언니의 집과 우리 집의 중간, 버스정류장으로 나오라고  문자를 보냈다. 후끈한 공기가 영영 사라지지 않을 것 같아도 저녁이면 선선한 공기가 그야말로 쿨하게 등장하는 시간이 좋았다. 나뭇잎이 어제보다 진한 초록빛을 뿜어내다가도 곧 노랗게, 빨갛게 질려버릴 것을 알아챌 수 있는 여름밤의 공기가 좋았다. 내내 짱짱할 것 같던 초록빛도 어느 순간 다른 색으로 물드는 것이 계절의 순리이듯 우리의 인생이 제발 다음 단계로 넘어가 주길, 평범한 직장인의 길이 우리에게도 무탈 없이 열리길 빌었다.



정해지지 않은 것이 많았던 날은 모두 여름밤이었나?  도서관 구내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산책을 한다고 주위를 서성이던 날도, 각종 시험공부에 치이면서 기력 보충을 위해 홍삼팩을 쪽쪽 들이켰던 때도 여름이었다. 불안하고 흔들리는 일이 오직 여름에만 찾아왔겠냐만은 유독 여름밤이 기억나는 것은 그 시절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함께 했던 사람들과의 기억 덕분이다. 여름밤은 이야기 나누기 좋은 때였다. 아무것도 없던 시절에도 해가 길어 시간만큼은 넉넉한 부자가 되었으니까. 확실한 것보다 불확실한 것이 많았던 시절이었지만 적어도 마음 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시간이 충분한 계절이었다. 함께 취업과 인생을 고민하던 사람들과 답도 없는 이야기를 나누느라 시간가는지도 모르고 헤프게 썼지만 그것으로 충분한 마음이었다.


" 언니는 금방 취업될 거야. 어디 가고 싶다 그랬지? 그래 그래. 화장품 회사. 언니랑 너무 잘 어울려! 거기 가면 나도 화장품 싸게 살 수 있는 건가?"

"우리 00은 스튜어디스 해보지, 잘 어울리는데?"

" 취업하면 그야말로 월급의 노예가 되는 거야. 우리는 어차피 잘 될 거니까 지금 이 시간을 잘 지내자!"

"Seize the day!" (당시 Carpe diem과 같은 이런 문장이 유행이어서 내 미니홈피 대문에 있던 말이었다. )


선선해진 밤공기에 계절의 변화를 느끼며 무엇이 되지 않은 서로에게 우리는 정말 잘 될 거라고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모를 말들을 나눴다. 그때 우리가 가진 것은 그런 것이었다.  


사실 여름이어서 좋았던 것은 없었다. 아마 한낮의 뜨거움이 유독 사람을 지치게 해 조금 낮아진 온도에 크게 반응했던 것도 같다. 바로 그 달라짐의 온도를 느끼기 위해, 특별히 나아감을 느끼지 못했지만 내일을 기대하자는 흔한 말을 나누기 위해 우리들은 여름밤 매일 만났다. 내가 무엇이 되기 이전, 아무것도 정해진 것이 없는 그때 말이다.


 지금은 어느 기업 다니는 누구, 어느 동네 사는 누구, 그리고 누군가의 엄마이기도 해서 당장 만날 수가 없다. '언제 한번 보자'라고 이야기하고 1년이 지나기도 한다. 그저 동네 친구였던 시절, 많이 불안했지만 모두가 그러해서 안정감을 느꼈그때의 여름밤 공기가 가끔 그립다. 무엇이 된 지금의 우리는 그때의 우리가 원했던 모습인지 동네 편의점에서 긴 여름밤, 이야기 나누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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