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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정한 밍블 Aug 07. 2021

오늘의 커피, 오늘의 이야기

직장생활은 대개 비슷한 흐름이다. 출근하기 싫지만 출근하고, 내내 퇴근하고 싶지만 여전히 회사인데, 결국 퇴근시간이 돌아오는. 나의 정신건강을 위해서 중간의 과정은 생략되는 경우가 많다. 허나 그렇게 지내면 7일 중 5일은 기억하고 싶지 않은 순간이 되어버린다. 7일 중 2일만을 기억하다니 이건 내 인생에 못 할 짓이다. 단편소설집 '겨울방학'의 단편 '0'에서 주인공이 말하듯이 '생각지도 못한 많은 것을 잃거나 잊어 가며 사는 게 분명한데…. 막상 알게 되어 신경 쓰는 것은' 번거로운 일이고 하고 싶지 않은 일이라 무심코 흘려보낸 나의 평일들. 내 인생에 대한 예의를 지키기 위해 나는 잃어버린 조각을 찾는 심정으로, 기어이 기억하고 싶은 순간들을 찾아내고 있다. 물론 그것이 행복한 시간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고.


‘오늘도 긴 하루였다. 힘들었다. 말하고 싶지 않다.’라고 하면 오늘은 지우고 싶은 하루였다는 뜻이다. 하지만 내 가슴을 찔렀던 상사의 이야기를 따옴표 넣어 표현하면 속풀이 글 한 편이 완성되고, 내 생각이 아닌 상사의 방향대로 따랐더니 결국 빙빙 돌며 헛짓거리만 했다는 하소연을 쓰면 직장인들의 공감을 얻을 수 있다. 글은 쓸모가 있다. 잘 쓴 글이든 못 쓴 글이든 적어도 내 인생의 기록이 되어 지워진 5일의 조각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퇴근하길 기다리나 싶은데 막상 퇴근하면 그것도 아닌 것 같고. 월급을 기다리나 싶어도 월급을 타면 또 그렇게 반갑지만은 않고. 뭔지 모르겠어. 뭘 기다리는지. 근데 기다리긴 한단 말이에요. 생각하고 생각하다가 도저히 모르겠다 싶을 때 내가 뭘 하느냐면. (...) 커피를 내리죠. 원두 20g을 2분 동안 200㎖ 딱 맞춰서 아주 정성스럽게. 온도에 따라 달라지는 향과 맛 다 느끼면서 천천히 한잔 마시다 보면 내가 이 순간을 기다렸나 싶기도 하고. (오늘의 커피, p261)


내 인생의 사라진 조각이 없도록, 나라는 존재가 미세먼지처럼 왔다가 사라지는 일이 없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기록에 목을 매지만 무엇을 남기고 싶어 하는지 글을 쓰는 나도 모른다. 도저히 모르겠다 싶으면서도 결국 한글 파일을 열고 있다. ‘온도에 따라 달라지는 향과 맛을 느끼면서 천천히 한잔 마시다 보면 내가 이 순간을 기다렸나 싶기도’ 하는 마음처럼 내가 쓰는 글도 그랬다. 직장 이야기를 신나게 고 싶은 날에 쓰는 글과 감성 가득한 문장에 꽂혀 쓰는 글의 느낌은 확연히 달라서 아, 나에게 이런 구석이 있었어? 하며 감동하게 되는 순간이 있다.  반드시 써야만 만날 수 있는 순간이라 어쩌면 나에게 감동하는 순간을 만나고 싶어서 글을 쓰는지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그럴 때 존재의 의미를 느끼니까.


오늘의 커피를 좋아한다. 오늘이라 가능한 커피, 오늘이라 가능한 이야기, 오늘이라 느낄 수 있는 감정이 소중하다. 사실 오늘은 상사에게 엄청나게 깨진 날이다. 잘하는 줄만 알고 쌩쌩 날아왔는데 너 아직 그렇게 잘하는 거 아니야, 라고 내 자리를 확인시켜주는 것처럼 정색한 상사의 표정을 보는 게 무척 괴로웠던 날이다. 쌓인 일보다 표정을 바꾸며 나를 들었다 놨다 하는 상사를 존경할 수 없어서 괴로웠던 날이다. 하지만 내 인생에 상사의 자리는 없다. 그저 오늘의 글감이 될 수 있을 뿐 전혀 타격받지 않았다. 분명 짜증 나고 괴로웠지만 내 인생에 미치는 영향은 그저 오늘의 글쓰기 소재일 뿐이다. 글 쓰는 나라서 좋다. 내 인생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오늘 일어난 일이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 적절한 거리에서 알 수 있는 최적의 방법이 내겐 글쓰기다.


흰 눈이 소복소복 언제 쌓이나 지루하게 풍경을 바라볼 때가 있다. 아무 영향도 주지 않을 것처럼 내려오는 눈송이의 무게는 잴 수 없으니 가볍게 여겨진다. 그 가벼운 눈송이는 쌓이고 쌓여 무게를 갖고 긴 겨울은 다가올수록 깊어진다. 나의 시간도 그렇게 쌓이고 있으니 내 글도 그렇다 믿는다. 일반인의 글 한 편이 어떤 영향을 줄까, 누구에게 도움이 되겠나 싶지만, 세상 어디의 나와 비슷한 아무개에게 위로의 마음을 선물할 수도 있다 생각하면 슬며시 웃음이 번진다.


마음 복잡한 날에 오늘의 커피처럼 쉽고 가볍게 누군가의 삶에 닿고 싶다.

당신이 무엇을 기다렸는지 모르지만 내 글로 인해 편안한 하루가 되었으면 한다.

그렇게 일상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위로되는 글을 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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