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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아한밍블 Oct 08. 2021

외로움의 순간, 타인의 얼굴을 보다.

'붕대감기'와 자기 결정권

이제는 너무 오래된 일처럼 느껴지지만 첫 아이를 키울 때 나는 참 외로웠고 힘들었다. 누구에게나 처음이 있고 시행착오는 있지만 '엄마'가 되는 것은 차원이 달랐다. 나는 모성애라는 감정이 없는 사람 같았고 왜 나만 유난하게 힘든지, 남들은 어찌 저렇게 잘 버티는지 신기했다. 아이가 큰 다음에도 아이를 미워한 시간이 죄스럽고 엄마로서의 자질이 없는 것처럼 느껴져 마음이 무거웠지만 동시에 '나'라는 사람은 '엄마'라는 거대한 역할에 가려져 하등 가치 없는 존재로 여겨져서 괴로웠다. 그런 시기를 지나온 나였기에 좋아하는 팟캐스트에서 낙태죄 헌법불합치 판결 전문을 들으며 눈물을 흘렸던 것 같다. 이상하게 그날 들은 판결문은 어려운 말 하나 없이 귀에 쏙쏙 들어왔다. 처음부터 끝까지 내 삶이었고 여자의 상황이었으니까. 판결문은 낙태죄가 여성의 기본권을 제한하고 있다고 말했는데 그 기본권이란 '자기 결정권'이었다. '자기 결정권'이라... 내 머릿속에는 오직 기본권인 자기 결정권만이 둥둥 떠다녔다.    

 

 '자기 결정권'이 나의 '기본권'이었구나.     


그냥 그 단어 자체가 굉장히 위로가 되었다. 누군가 나의 기본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 나의 기본권을 내 주변인이 아닌 권위 있는 판사들이 공식적으로 챙겨주는 느낌이 들어서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엄마의 삶은 누구나 겪는 당연한 삶이 아닌데 완전히 다른 차원의 삶을 온몸으로 부딪히며 살아내고 있음에도 그것을 아무도 모르는 것 같아 외로웠다. 누군가가 정확히 알아주기를 바랐다. ‘힘들지.? 원래 힘들 때야..’라는 문장 속 '원래'라는 단어로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무엇이 문제인지 본질을 흐리며 고통을 뭉뚱그리고 싶지 않았다. 좀 더 공식적이고 절차적인 존중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아. 겪어보지 않으면 모르는구나. 나는 판사들의 공식적이고 법리적인 판결문을 통해 나의 기본권을 챙김 받음으로써 비로소 알게 되었다. 한때는 너무 당연했던 자기 결정권이 암묵적인 합의와 시선으로 인해 훼손될 수도, 다시 살아날 수도 있다는 것을 경험하면서 당사자만이 아는 문제를 알게 된 것이다. 당사자가 되어야만 알 수 있는 문제라니. 이 얼마나 외로운 문제인가? 그때부터 ‘페미니즘’이라는 단어에 관심을 가졌고 적어도 내가 겪지 못한 문제라면 '왜 저렇게 유난이야?'라는 생각은 하지 말아야겠다 다짐했다. 공감하기 위해, 배우기 위해 읽게 된 여러 페미니즘 책 중 ‘붕대감기’는 지켜지지 않는 걸 구별해 지키는 사람과 삶에서 지켜야 할 것이 너무 많아 페미니즘까지는 생각도 할 수 없는 사람의 이야기를 동시에 담고 있어 특별했다.     


p63. 내가 삶으로 꽉 차서 폭발해버리지 않게 하려면 나는 나의 어떤 부분을 헐어서 공간을 만들어내야 하는데, 그렇게 얻어낸 공간에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로부터 오는 부정적 감정을 채울 수는 없다는 것, 내가 살아온 삶의 궤적을 전혀 모르고 내 삶을 대신 살아줄 것도 아닌 사람들을 존중하기 위해 내가 선택한 삶에 대한 미움을 집어넣을 수는 도저히 없다는 것, 그게 내가 해낼 수 있었던 최선의 생각이야. 내가 아는 사람들,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한 마음이 들어가면 그 자리는 꽉 차 버리는 걸. [붕대감기, 윤이형]     


진경은 늘 인기가 많았던 아이고 세연은 따돌림을 당하던 아이였다. 세연은 특별히 무엇을 해야만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었고 진경에게는 그저 얻어지는 것이 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세연이 해왔던 특별한 노력은 그럴싸한 커리어로 전환되었고 진경은 탈 없는 삶을 사는 보통의 사람이 되었다. 누구의 삶이 더 나은 삶이라고 말할 수 없다. 다만 알게 된 것은 사회적 이슈에 목소리를 내지 않는 사람은 생각이 없어서가 아니라 자신이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한 마음으로 채우기에도 이미 삶이 꽉 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페미니즘을 다룬 소설에 진경의 목소리가 들어가면서 목소리를 내지 않는(못하는) 사람의 마음까지 챙겨준 작가가 참 고마웠다. 그 목소리까지 챙겨 들을 수 있는 사람이 함께 멀리 갈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다른 생각을 하고 다른 감정을 갖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 다만 내게 '자기 결정권'이라곤 하나도 없는 것 같이 여겨졌던 시기가 누군가에게는 지금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서로 도울 수 있었으면 좋겠고 현재 행복을 누리는 사람은 그 행복을 전하면 좋겠다. 이 정도면 충분하지, 쟤는 뭐가 그리 불만이야? 나는 힘든데 너는 행복해? 서로 눈을 흘기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모두가 같은 생각, 같은 감정을 느끼며 똑같이 행진해야 정상 범주인 것이 아니라 각자의 자리에서 앞, 뒤 사람을 돌아봐줄 수 있는 여유를 가졌으면 좋겠다. '자기 결정권'의 '자기'의 범주에 여러 상황을 인정해줄 수 있는 사람이 되길 꿈꾼다. 우린 같은 시대에 같은 경험을 공유하는 동시에 각자 다른 삶을 살고 있으니까. 그 삶을 존중하고 귀 기울이는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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