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거 누구 똥이야?
인정하고 싶지 않은 내 모습
"에그, 이게 뭐야! 누가 내 머리에 똥 쌌어?" 두더지가 소리쳤어요.
베르너 홀츠바르트의 『누가 내 머리에 똥 쌌어』 는 자신의 머리에 똥이 떨어지자 화가 난 두더지가 똥을 싼 범인을 찾는 이야기이다. 아이들은 똥이라는 단어에 마냥 자지러지고, 동물들의 똥을 확인해 범인을 찾아 복수를 하는 두더지가 귀여워 피식 웃게 된다. 사실은 이 책의 유명함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똥이라는 단어만 나오면 아이들이 좋아하니까 유명해졌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똥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리라곤 나도 몰랐다.
일하다 보면 다른 사람이 싼 똥을 내가 치우게 될 때가 있다. 분개할 만한 상황이지만 이게 누구 똥이니, 왜 여기다 이런 똥을 쌌니, 게다가 이걸 왜 내가 치우니 등등의 이야기는 에너지 낭비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힘이 남는다면 말똥 치우듯 쓱 쓸어 담아 버리고 내 판을 깔면 된다.
그 똥이라 하는 것들은 사실 성과였다. 상사가 원하는 방향이 아니거나, 흐름에 맞지 않다 여겨져 ‘똥’이 되었지만 누군가의 입장에서는 애써서 가꾼 노력의 결과물인 것이다. 나 역시 똥을 싼다. 원하는 모습이 아닌 사회적 가면을 쓴 내가 활개를 친 이후, 다시 차분한 나로 돌아온 아침에 느끼는 어제의 나는 당장 치워버리고 싶은 똥이다. 정제되지 않은 날것의 복잡한 감정들 역시 그렇다. 유독 똥이 많이 나오는 볼펜을 쓸 때 노트가 얼룩덜룩 잉크로 지저분해지는 것처럼, 정리되지 않은 감정을 어쭙잖게 풀어낸 글에도 똥 천지다. 그런데 어쩌겠나? 내겐 똥같이 더럽고 마음에 들지 않은 모습이 주어진 사회적 역할일 때가 있고, 정리되지 않은 감정이기에 배출해야 내 속이 편안해진다. 왜 그런 감정을 느꼈는지 글로 풀어내지 않으면 배알이 꼬여 잔뜩 화가 난 내가 더 견딜 수 없는걸.
똥을 싸는 일은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었다. 두더지 머리 위에 싸고 모른 척해 문제였지 똥 자체는 오히려 자신을 드러내는 결과물이었다. 범인을 찾는 과정에서 확인한 동물들의 똥이 같은 것이 있었는가? 내 똥은 이렇잖아! 범인을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함이기까지 했다. 사실은 다른 사람의 똥을 치우는 것에는 오히려 거부감이 없었다. 똥이니까. 다른 사람의 것이니까. 더럽다 여기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내 것은 달랐다. 왜 이런 똥을 쌌어, 왜 하필 지금이야. 냄새는 왜 이래. 마음에 들지 않는 것 투성이었다.
“엄마! 이것 좀 봐!!”
뭐 대단한 것을 발견했나, 놀라워하는 목소리에 달려가 보면 바나나 똥을 쌌다고 자랑하는 얼굴일 때가 있다. 허탈해하면서도 “우와! 진짜 바나나네. 잘했네!” 칭찬을 해준다. 유아일 때만이 아니라 변비가 있던 아이라 초등학생인 지금도 그렇다. 비록 잠깐 머물다 곧 물에 휩쓸려 사라지지만 칭찬은 아이에게 남는다.
요즘 유독 직장에서 내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마음에 들지 않는 내 모습을 사람들이 좋아한다는 것을 알기에 자주 그 모습을 꺼내는 내가 또 마뜩잖다. 똥으로 여기는 모습과 글이지만 나를 드러내는 유일성이기도 하니 어쨌든 시원하게 배출하고 물을 내린다. 배출해서 다행이잖아. 마음에 안 들면 물을 내리면 되지. 똥일지언정 바나나 똥이라고 칭찬해주는 누군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글을 쓴다. 잘했네! 무슨 모양인지는 모르겠어도 꺼내놓으니 다행이네! 변비 걸릴 일은 없겠네.
“너는 네 똥을 어떻게 생각해?”
“바나나 똥을 싸면 좀 뿌듯하지.”
“바나나 똥 아니면?”
“냄새나고 더럽지. 엄마 요즘 똥 얘기를 많이 하네? 무슨 책을 읽은 거야?”
그러게. 보통은 무슨 책을 읽다가 심오해지는데 회식 다음날 아, 싫다. 진짜. 하는 혼잣말에서 시작된 이야기다. 가끔 무심하게 이런저런 일을 잘 처리하는 내 모습이 뿌듯하다가도 회식 다음날엔 한 번도 내가 좋았던 적이 없어 해 본 생각들이다. 머리가 깨질 듯 아프고 어지러운 아침, 이런 날은 더 단정하고 흐트러짐 없어야 해. 하고 조금 비싼 브랜드의 옷을 꺼내 입거나 화려하게 예쁜 옷을 골라 입는 내가 끝까지 마음에 들지 않아 시작한 글이다.
그 모습도 너야.
똥 싸서 다행이잖아.
물 내리고 출근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