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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정한 밍블 Jun 24. 2024

더워서 그래, 에어컨을 켜

출근은 언제나 힘겨웠다. 제각기 다른 키의 콩나물이 빽빽이 심어진 시루 같은 지하철에서 한 시간 반을 시달리고 토해져 나오면 하루의 에너지가 하나도 남김없이, 전부, 털리고 말았다. 구의역 3번 출구에서 300m가량을 터덜터덜 생각 없이 걸어 사무실 의자에 턱, 몸뚱이를 걸치는 순간 영혼은 재빨리 빠져나가곤 했다. 유일하게 ‘사무실에 도착해 다행이다’ 여긴 때는 지금같이 더운 여름철이었다. 냉방비 걱정 없이 에어컨이 돌아가 카디건을 걸치면 딱 기분 좋고, 업무의 강도는 서서히 약해져, 딴짓을 할 수 있는 시간이 슬며시 길어지는 여름. 바로 지금이다. 퇴사 9개월 차 처음으로 사무실이 그리웠다. 영혼 없이 검정 메시 사무용 의자에 앉아 컴퓨터를 켜는 일, 아 시원하다 멍 때리는 일, 메일함을 열어 간단한 보고서 양식들을 보며 대단한 일을 해야 한다는 듯이 일부러 더 투덜거리는 일, 오늘은 이 보고만 종일 붙잡고 있어야지, 나름의 업무 철벽을 치는 일 등 무의미하게 여겨졌던 그 일들이 새삼 그리웠다.               




단순히 더워서 그런 걸까? 퇴사 이후 나의 큰 과업이었던 출간과 독서 모임, 경제 스터디까지 매일의 작업을 성실히 해내고 있었으므로 오늘 아침 역시 그러한 루틴을 따르면 될 것이었다. 그런데 어쩐지 씁쓸한 생각들이 따라왔다.               



“계절의 변화를 감각하는 삶을 살고 싶어. 여름의 쨍한 초록색, 장마철의 조금은 우울하고 끈적한 기분, 가을의 오색찬란함, 겨울의 하얀 세상 혹독한 추위, 봄의 아름다움과 변덕 그냥 계절 변화 자체를 누릴 수 있는 삶 말이야.”               



퇴사 전 내가 원하는 삶을 말할 때 하던 말이다. 그런데 이제야 민감한 감각의 다른 면을 보게 되었다. 계절의 변화를 충실하게 느끼는 삶이라면 사람 사이의 감정 또한 충만하게 피어오를 텐데 그 점은 미처 생각지 못했다. 글을 쓰려고 앉은 주방 식탁에서는 계절의 변화보다 지난밤의 내 감정이 먼저 생각났지만, 단순한 일과 안에서 기분전환이라 할 만한 이벤트는 거의 없었다. 그래서인지 대부분의 즐거운 감정보다 10%의 부정적인 감정에 더 큰 영향을 받곤했다.               



책 출간이라는 큰 이벤트 앞에서도 비슷했다. ‘이건 정말 멋진 일이야. 책의 판매와 상관없이 그동안 나의 시간을 아는 사람들의 진심 어린 축하를 받는 일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행복하고 감사해’라고 했지만, 이런저런 평가와 뒷말을 전혀 몰라서 행복해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많은 시간 한마디 한마디 곱씹으며 부르르 떨기도 하고 절치부심하기도 하면서 잊자 할 뿐이었다. 겉으론 아무 일 없어 보이는 평온한 하루를 혼자 감정적으로 오르락내리락하다 보니 냉방병 걱정을 하며 카디건을 찾는 하루를 그리워 했는지도 모른다.


           


아주 잠깐 한가해진 여름 사무실의 풍경이 떠오르는 건 지난 시간이라 그렇다. 하지만 아주 가끔 초를 치는 사람들, 의욕을 꺾고 되지도 않는 오만한 표정의 사람들을 만나 이런저런 답이 없는 충고를 듣고 있자면 사무 분장에 따른 일, 아니. 업무 범위 밖의 일까지 주섬주섬 떠안으며 똥 씹은 얼굴로 기계적으로 하던 때가 오히려 좋았나 싶다. 함께 욕할 동료도 있고 말이다.               




할 일을 내가 정하고, 하고 싶은 일을 한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그런데 반갑지 않은 의무가 따라왔다. 상사도 아닌 사람들에게 자꾸 설명을 해야 했다. 시켜서 하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설명을 듣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아진 느낌이다. 졸지에 영업사원이 되어 내 삶을 세일즈 하려니 아무리 고객이라도 내 이야기를 당당히 요구하는 무례함이 참기 힘들다. 방구석에서 혼자 화를 낸다. 정말 무례하다고. 당신은 정말 무례하군요. 같은 말을 반복한다. 그런 일밖에 할 수 없었다. 백번 천 번 생각하다 내가 할 수 있는 적당한 말들을 골라낸다.          



오늘은 내 기분을 어떤 방식으로 전환시켜야 할까? 점심은 뭘 먹을까? 누군가를 원망하고 싶은 마음을, 아니 걔는 왜 그래? 이거 무슨 뜻이야? 그냥 한두 마디로 충분한 쓸데없는 이야기들. 그런데 어쩐지 이제는 진중한 사람이 되어야 할 것 같은 지금 내가 할 수 없는 이야기들. 누워서 침 뱉기. 퉤 퉤 퉤 그냥 내가 맞고 말지. 퉤 퉤 퉤. 상념과 음악, 쌓인 책들, 내게 많은 것을 생각하며 위안을 찾는다. 잘하는 것을 생각하며 나를 격려한다. 영혼 없이 반복하는 일 어때? 그래, 다시 직장인의 마음을 갖자. 아직은 더 부지런히 노오오오력할 때니까. 전기세가 나오든 말든 그냥 사무실과 같은 환경으로 에어컨을 켜고 영혼 없이 하던 일을 비슷한 모양으로 하면 그만이다. 직장인의 꾸역꾸역 마인드가 얼마나 멋진 것인지 안다. 시간을 때우면 어느새 보고는 끝이 나고 퇴근시간이 되는 기적을 매일 맛보지 않았던가! 무례한 고객은 머릿속에서 몰아내고 회사에서 하던 대로 집안에서도 나의 루틴으로 승부를 보겠다. 루틴이 있는 사람은 절대 망하지 않으니까. 그래 우선 제일 중요한 에어컨을 켜고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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