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려오는 친구들의 마음을 재단하지 않기
아이와『가만히 들어 주었어』를 읽고
‘언니는 나에게 토끼 같은 사람.’
『가만히 들어 주었어』 라는 그림책을 추천한 친구가 내게 해 준 말이었다. 책 속에 나오는 토끼가 어떤 존재인지 정확히 모르지만, 제목에서 추측한 대로 내가 정말 가만히 들어주는 사람인가는 자신이 없었다. 다양한 동물들이 등장하여 속상한 아이를 달래주는 이 책에서 가장 마지막에 나오는 토끼는 아주 조금씩 테일러의 곁으로 갔다. 테일러가 하는 이야기를 그저 들어주면서 말없이 곁에서 체온을 전할 뿐이었다. 내가 이런 존재라고? 나는 가만히 있어 주는 사람이 아니라 충조평판의 1인자인데 누군가에게 토끼 같은 사람이라니 이상했다.
사랑이와 이야기하다 보면 어김없이 동화책 한 권이 흘러나온다. 어느 날은 아, 『가만히 들어 주었어』의 토끼처럼? 하고 말하길래 반가운 마음에 ”사랑아, 너도 그 책 읽었어? 사랑이는 어떤 사람이야? 거기 나오는 동물들 중에서 말이야.“ 하고 다급하게 물었다.
”꼬꼬댁 꼬꼬꼬 에구머니나! 이를 어째, 어떻게 이런 일이“
”말해 봐, 말해 봐. 어떻게 된 건지 말해 봐! 꼬꼬댁 꼬꼬꼬!“
관심사를 발견하고 고민도 금방 알아채지만 기다리지 못하고 질문을 퍼붓는 나는 영락없는 닭과 비슷했다. 『가만히 들어 주었어』에는 다양한 동물이 자신의 특성대로 아이를 위로한다. 성미 급하게 상황 설명을 요구하기도 하고(닭), 소리를 지르면 기분이 괜찮아진다고 하기도 하고(곰), 문제를 해결해 주겠다고 나서는 동물도 있다.(코끼리) 그 밖에 웃고 마는 하이에나, 숨으라는 타조, 그냥 다 치우자는 캥거루, 다른 상황을 만들어 상황을 반전시키려는 뱀까지 위로의 방법도 다양했다.
”사랑이도 닭 아냐? 엄마랑 비슷하잖아? 언니는, 언니는 누구랑 비슷하지?“ 나는 여전히 질문을 퍼붓는다. ”다른 사람은 모르겠고 아빠는 뱀!“ ”아빠가 왜 뱀이야?“ ”아빠는 상황에 맞지 않는 소리를 해. 그냥 막 다른 소리를 한다니까. 내 기분이 중요한 게 아니라 억지로 시선을 돌려.“ 그런가? ”아빠는 코끼리 아냐? 뭘 망가뜨리거나 하면 자기가 다시 고쳐준다고, 해결해주면 된다고 생각하잖아.“
성격이 급하고 옳은 소리를 잘하는 점이 닮은 사랑이와 나는, 가족 구성원이 어떤 동물을 닮았는지 신나게 얘기했다. 이런 내가 토끼 같은 사람이라고?
내 성격을 가리고 사람들을 관찰하고 있을 시점에 그 친구를 만났는지도 모른다. 본래 나는 토끼 같은 사람이 아니었지만, 토끼같이 가만히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고 하니 계속 그래야 할 것 같은 부담이 생겼다. 왜냐하면 토끼가 가장 멋진 친구 같았으니까. 사실 나는 닭인데 닭은 너무 경박스러워 보였다. 울음소리도 어쩜 저렇게 시끄러운지.
”사랑아, 너는 혹시 토끼 말고 어떤 동물이 좋아?“
”음. 글쎄....“ 제일 먼저 테일러의 기분을 알아챈 닭에게도 기회가 있을까 싶어 물었다. 사랑이는 한참을 생각하다 대답했다. ”근데 말이야 엄마. 동물들은 모두 친구를 위로해주러 왔어. 그니까 사실 다 좋은 친구들인 거지. 모두 착한 동물들이야“
희한하게 인정받은 기분이 들었다. 콕 집어 닭을 칭찬해주지 않은 것이 더 고마웠다. 내가 늘 닭인 것은 아닌데 토끼가 아니란 생각을 하자 갑자기 시야가 좁아졌다. 토끼와 토끼가 아닌 동물 두 가지만 존재하는 것처럼. 하지만 누구나 한가지 모습만 가졌을 리 없다. 때로는 문제를 해결하는 코끼리가 되기도 하고, 웃거나 숨어버리는 하이에나, 타조가 되기도 하는데 그때마다 토끼가 아니라고 슬퍼할 이유는 없다. 눈치 빠른 닭이 좋다 하지 않고 모두 위로해주러 온 마음이 있으니 좋은 친구라 하는 사랑이의 말을 들으니 안심이 됐다.
그저 아이와 이야기하기 좋다고만 생각했다. 다 다른 위로법을 가진 동물들을 보면서 누가 나은지, 어떤 위로가 진짜인지를 가리기 바빴다. 내게 어떤 위로가 힘이 되는지만 생각하느라 동물들이 테일러 곁에 온 마음은 보지 못했다. 내게 토끼라고 말해주었던 친구의 말에 기뻤지만 사실 토끼가 될 수 없어 시무룩해지기까지 했다. 어쨌든 토끼가 주인공이니까 내가 제일 좋은 친구라고 생각하면서 주변의 다른 사람들은 어떤 동물일까만 생각했다.
보지 못하는 것이 가득한 내게, 사랑이는 다른 세계를 보여줬다. 어느 한 캐릭터만 좋다 생각하면 타인에게도 좁은 틀을 씌울 수 밖에 없다. 내가 너에게 토끼 같은 사람이 되었으니 너도 나에게 토끼 같은 사람이 돼줘야지...은연 중에 무엇이 되라고 강요하지는 않았을까?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이해하지 못하고 오해했던 시간들이 스쳐 지나갔다. 가장 먼저 물어봐 주는 사람의 역할이 있고,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의 역할이 있다. 어떤 사람이 가장 좋은 친구인지 가려내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친구에게 달려가는 그 마음으로 각자의 역할을 하면 된다. 그 외의 다른 점은 또 서로 맞춰가면서 배우겠지.
◆ 공감: 다르지만 공감해.
‘가만히 들어주었어’ 라는 책을 읽으면서도 아이에게 질문만 퍼부었다. 부끄럽지만 어른답기보다는 내가 궁금한 게 더 먼저이고, 감정이 앞서는 날들이 여전히 많다. 너무 다그치듯 물었나? 하고 멋쩍은 얼굴을 하지만 몰랐던 아이의 생각과 시각을 알게 되는 것은 전에 없던 기쁨이라 미숙한 모습 그대로 자꾸만 질문을 한다. 그리고 어쩌면 자신의 이야기를 듣는 엄마의 열린 태도, 때로는 부족해 보이는 모습을 통해서 오히려 공감을 배울지도 모른다며 멋대로 기대한다. 사실은 내가 아이들에게 배우는 게 더 크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