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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아한밍블 Aug 08. 2020

산책을 하자, 만만한 동네 언니가 되자.

따뜻한 미소를 머금고.



SNS에서 보이는 내 모습은 단단한 사람이었다. 책을 많이 읽고 매일 경제기사도 빠지지 않고 요약하며 휴직을 했지만 사회생활의 끈도 놓지 않는 사람. 매일 업로드한 나의 블로그에는 이런 모습이 보기 좋게 펼쳐져 있다. 이 모습은 거짓이 아니나 나라는 사람은 이런 그럴싸한 사진과 텍스트로만 이뤄지지 않았다. 활자로 표현하지 못한 소심함과 예민함 역시 나를 구성하는 엄연한 캐릭터임을 슬며시 고백한다.


나는 사실 부당한 대우에 목소리를 내는 쪽이 아니라 나를 소모하는 방법으로 울음을 삼키는 사람, 문제를 제기하기보다는 그럴 수 있지...라고 상대를 이해하려는 방법을 택하는 지극히 소심한, 때로는 미련한 사람이다. 보이지 않는 SNS 세상에서 내가 꾸준할 수 있었던 이유는 사실 내가 성실해서, 대단한 기준이 있어서, 특별한 재능이 있어서가 아니라 혼자만 갖고 있던 생각을 실제 목소리가 아닌 글자로 맘껏 펼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블로그에서는 안전한 모니터 뒤에 있기 때문에 편안했고 내 글로 누군가 피해를 보는 일은 없을 테니까 내 생각을 숨김없이 말하다보니 그것이 단단해 보인다는 평가로 이어진 것 같다.


그 모습 역시 거짓은 아니다. 직장이 아닌 곳, 내가 안전하다 여기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는 SNS에서 보이는 모습처럼 좋은 언니, 단단한 사람으로 남기 위해 비슷하게 노력했다. 그것은 사람들의 시선과 평가를 의식해 나의 행동을 제한하는 것과는 조금 다른 결인데 나의 이상형을 스스로 이미지화해보고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려는 노력이다.


 나의 SNS에서 보이는 모습과  실제 자아를 결합해 현실에 내놓은 이미지는 '언니'였다. 나를 부르는 수많은 말 중에 가장 내게 친근하고 무게감이 없으면서 의미가 있었던 호칭인 바로 그 '언니'.


나를 '언니'라 부르는 사람이 많았다. 여대를 다니며 동아리 활동을 통해 많은 사람을 만났고 교회활동을 통해서도 관계를 쌓아갔는데 나는 선배보다는 후배가 편한 쪽이었다. 특별히 무엇을 가르치거나 배운다는 부담이 없이 밥 한 끼를 먹어도 그저 리프레쉬되는 느낌이 좋았고 의미 없는 재잘거림이 즐거워서 많은 후배들 밥을 사주고 다녔다. 한때는 내가 그저 '밥 잘 사 주는 언니'가 된 것이 서운하기도 했는데 결국 '밥'은 모든 것에 우선이었으니 '밥 잘 사 주는 언니'가 '이야기하고 싶은 언니'가 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달까? (웃음)



나는 '언니'라는 나의 정체성에 매력을 느낀다.

그냥 할 일은 없고 무료해서 툭툭 털고 일어나 동네 한 바퀴 산책을 나섰는데 우연히 길에서 만난 '언니'와의 즐거운 대화의 경험 다 있지 않나?


 "우리 여기서 왜 이러고 있니?"


 민망해하면서도 누구 한 사람 이야기를 끊지 못했던 경험, 전봇대의 각종 벌레들이 꼬여들 때쯤에야 집에 가야겠다 생각하면서도 서둘러 들어가지지 않는 그런 만남 말이다. 슬리퍼 신고 어정쩡하게 나무 밑이나 전봇대 희미한 불빛 아래서 나누는 별거 아닌 듯 하지만 사실 가장 중요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동네언니' 딱 그 정도의 역할을 나는 꿈 꾼다. 물론 가벼운 이야기가 갑자기 깊어질 수도 있지만 깊은 무게감을 가지고 일부러 시간과 장소를 정해 떨리는 마음을 가득 담은 각 잡은 만남보다는 산책 같은 만남에서 보석을 발견하는 기분을 서로에게 선물할 수 있는 관계를 선호한다.


가벼움을 위한 처절한 고민, 잔잔함을 위한 수많은 파동, 미소를 위한 수많은 눈물을 겪은 사람만이 가벼운 산책길에서 흔들리는 자아를 발견해 햇살 같은 따스함을 건넬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여전히 잘 울고 잘 토라지고 잘 흔들리는 나약한 지만 그저 지나가는 산책길에 '언니!'라는 반가운 외침을 듣는 사람이 되고 싶다. 별거 아닌 듯 소중한 그 관계를 위해 부지런히 그리고 단단히 일상을 쌓아간다.


후에 우리 딸들이 나를 '언니'라 부르던 후배들과 비슷한 고민을 할 때 ‘그때 내가 어떻게 했지?’ 가물거리는 기억을 더듬어 ‘그냥 어떻게 어떻게 한 것 같아. 그냥 해보면 돼’라는 애매한 말로 어물쩡거리지 않으려면 지금 내가 쌓을 수 있는 관계와 일상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두려움의 과정을 세분화시키고 해체해보니 별거 아니더라는 생생한 나의 감정, 깨달음을 기록하는 행위를 통해 남겨놓는다. 꼰대처럼 'Latte is horse~'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산책'같은 가벼운 만남에서의 반짝! 짧지만 따뜻한 햇살이 되기 위해.


그리고 그 노력은 자연스레 나에 대한 사랑으로 이어졌다.

좋은 언니, 좋은 엄마라는 건 타인이 아니라 바로 나이니까.



"그럼 지구 상에 먹고 먹히는 관계랑 그렇게 서로 돕는 관계랑 어느 쪽이 더 많은지도 아니? 아닌가? 그걸 숫자로 비교할 수는 없으려나?" 웅이 입으로 잔을 가져가려던 동작을 멈췄다.

"어쨌거나 우리 쌍둥이들한테도 그렇게 알려 줄 수는 있다는 거지? 니모부터 꽃 한 송이까지 자연에도 공생이 넘쳐난다고. 그게 막 피부로 느껴지지는 않을지 몰라도."

"얘기해 주면서 같이 더 많이 찾아봐. 그럼 피부로도 느껴질지 모르잖아." p151

[모두 너와 이야기하고 싶어 해/은모든]


내가 모든 것을 알려줄 수 없지만 얘기하면서 같이 더 많은 것을 찾고 피부로도 느끼는 삶을 살아내고 싶다.

나의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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