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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아한밍블 Aug 18. 2020

엄마는 페미니스트?

윤이형 작가의 붕대감기를 읽고


페미니즘연대.


내가 가장 닭살스러워하면서도 자꾸만 기웃거리는 단어를 꼽으라면 아마 저 두 단어일 것이다.

내가 페미니즘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낙태죄 헌법불합치 판결이 날 때쯤부터다.

나는 누가 좋다 하는 것은 참 잘 듣고 행하는 사람인데 '듣똑라'라는 팟캐스트가 꽤 유익하다는 한 줄의 추천글을 보게 되었다. 아, 이걸 들으면 나와 전혀 관계없다 생각했던 시사문제, 정치적 이슈에 대해 한 마디쯤은 아는 척을 하거나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이 될 수 있는 건가? 싶은 마음이 들어 하나하나 꽤 열심히 들었다. 내게 거리가 있던 시사상식과 정치적 이슈를 3명의 기자들이 돌아가며 나와 같은 수준으로 수다 떨듯이 이야기해주니 '듣똑라(듣다 보면 똑똑해지는 라이프)'를 참 애정 하게 될 수밖에 없었다. 유난히 시간이 많아 뒹굴거리던 어느 오후, 나는 우연히 낙태죄 헌법불합치 판결 전문을 듣게 되었다. 당시 나는 판결문이라는 것은 판사들이 어려운 말을 가득 풀어놓음으로써 자신들의 권위를 과시하는, 소시민을 기죽이는 어려운 문장의 향연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상하게 그날 들은 판결문은 귀에 쏙쏙 꽂히며 여성을 위로하는 세상 따뜻한 편지처럼 다가왔다.


아니, 사실 나는 판결 전문을 들으며 울고 있었다.


이제는 너무 오래된 일처럼 느껴지지만 첫 아이를 키울 때 나는 참 외로웠고 힘들었다. 누구나 처음은 있는 법이고 누구나 시행착오는 있지만 '엄마'가 되는 것은 차원이 달랐다. 나는 모성애라는 감정이 없는 사람 같았고 왜 나만 유난하게 힘든가? 남들은 어찌 저렇게 잘 버티나 하루하루가 신기했던 시간이었다.


 이미 지나온 시간이지만 아이를 미워한 시간이 죄스럽고 모자라게 느껴져 아이가 큰 다음에도 그때 내가 이런 마음이었다.. 누구에게도 고백하지 못한 마음이 늘 있었다. '엄마'로 사는 것은 '나'를 뒷전으로 여기는 삶으로 느껴져 불만이었고 '나'는 '엄마'라는 신성한 역할 앞에서 하등 가치 없는 열등한 존재로 여겨져서 괴로웠다. 그런 시기를 지나온 내게 판결문은 낙태죄가 여성의 기본권을 제한하고 있다고 말했는데 그 기본권이란 '자기 결정권'이었다. '자기 결정권'이라... 내 머릿속에는 오직 기본권인 자기 결정권만이 남았다.


'자기 결정권'이 나의 '기본권'이었구나.


그냥 그 단어 자체가 굉장히 위로가 되었다. 누군가 나의 기본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 나의 기본권을 내 주변인이 아닌 권위 있는 판사들이 공식적으로 챙겨주는 느낌이 들어서 주르르 눈물이 흘렀다. (내가 기본권이 억압받는 삶을 살아서가 아니라 엄청난 고통을 받아서가 아니라 단지 엄마의 삶이 누구나 겪는 당연한 삶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차원의 삶이라는 것을 그저 누군가가 알아주기를 바랐다. 그래 힘들지.? 힘들 때야... 너도 알고 나도 알고 여자들은 다 알지.. 이런 이야기가 아닌 좀 더 공식적이고 절차적인 존중 말이다.)

아. 겪어보지 않으면 모르는구나. 나는 판사들의 공식적이고 법리적인 판결문을 통해 나의 기본권을 챙김 받음으로써 비로소 알게 되었다. 내게도 한때는 너무 당연했던 자기 결정권이 사회적인 합의, 암묵적인 무거운 시선들로 인해 훼손될 수 있으며 또한 같은 방법으로 다시 살아날 수도 있다는 것을 경험하면서 내가 겪어봐야 명확히 알게 되는 문제가 분명 있구나 싶었다. (물론 판결문에서 말하는 자기 결정권은 매우 폭넓게 생각할 수 있고 나의 경우에도 특정 사건으로 훼손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닌 엄마로서의 삶의 영역에서 다양하게 마모된 감정을 말하는 것이다.)



나는 그때부터 '페미니즘'이라는 단어에 관심을 가졌고 '내가 모르는 고통이니 할 말 없어' 하며 그냥 지나치는 사람은 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잘 모르면서 '왜 저렇게 유난이야?'라는 생각은 하지 말아야겠다 다짐하며 여전히 백 프로 공감하지는 못하지만 페미니즘을 다룬 이야기들을 읽으려고 노력했다. 내가 크게 불합리한 삶을 산 것은 아니지만 당연하지 않은 것까지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삶을 아이에게 물려주지는 말아야겠다는 생각으로 내 경험만이 아니라 사회의 다양한 입장을 보기 위해 노력했다.


여튼간 몇 안 되는 책을 보았지만 나와 가장 접점이 많고 편안하게 다가온 책은 바로 얼마 전 읽은 윤이형 작가님의 붕대감기라는 책이었다. 이 말을 하려고 서론이 무지하게 길었다. 쓰는 것도 무지하게 조심스러웠는데 매끄러운 이어짐이 될지 모르겠다.


'페미니즘.'

이 말은 필요한 단어인가?


페미니즘이 무엇인가? 여성의 권리란 따로 있는 것인가? 인간의 존엄성이라고 나와있지 여성과 남성의 존엄성이 따로 있지는 않은데? 하는 생각은 결론적인 이야기일 테다. 특별히 지켜지지 않는 게 있으니 지키기 위해, 구별하여 강조하기 위해 나온 말이겠지. 그것을 구별해 지키는 사람이 있고 또 삶에서 지켜야 할 것이 너무 많아 페미니즘까지는 생각도 할 수 없는 사람이 있다. 윤이형의 붕대감기에서는 그것까지 다뤄주어 특별했다.


p63. 내가 삶으로 꽉 차서 폭발해버리지 않게 하려면 나는 나의 어떤 부분을 헐어서 공간을 만들어내야 하는데, 그렇게 얻어낸 공간에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로부터 오는 부정적 감정을 채울 수는 없다는 것, 내가 살아온 삶의 궤적을 전혀 모르고 내 삶을 대신 살아줄 것도 아닌 사람들을 존중하기 위해 내가 선택한 삶에 대한 미움을 집어넣을 수는 도저히 없다는 것, 그가 내가 해낼 수 있었던 최선의 생각이야. 내가 아는 사람들,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한 마음이 들어가면 그 자리는 꽉 차 버리는 걸.(세연과 진경의 이야기)

진경은 늘 인기가 많았던 아이고 세연은 따돌림을 당하던 아이였다. 세연은 특별히 무엇을 해야만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었고 진경에게는 그저 얻어지는 것이 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세연이 해왔던 특별한 노력은 그럴싸한 커리어로 전환되었고 진경은 탈 없는 삶을 사는 보통의 사람이 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누구의 삶은 의미가 있고 누구의 삶은 의미가 없느냐 하는 것이 아니란 것. 사회적 문제나 이슈에 목소리를 내지 않는 것은 생각이 없어서가 아니라 내가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한 마음으로 채우기에도 이미 내 삶이 꽉 차기 때문이라는 것. 페미니즘을 다룬 소설에 진경의 목소리가 들어가면서 목소리를 내지 않는(못하는) 사람의 마음까지 챙겨준 작가가 참 품이 넓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래야 우리가 함께 멀리 갈 수 있다는 생각도 했다.



p123. 내가 그렇게 훌륭한 사람은 아니지만, 선생님을 많이 좋아하고, 잘 챙겨드릴 수 있어. 병원 잘 다니시게 감시하고, 아주 건강해지게는 못해도 지금보다 많이 나빠지지 않게는 해드릴 수 있을 것 같다. 20년 넘게 나한테 좋은 선배가 돼서 이끌어주셨으니까 이제 내가 갚으려고 해. 그걸.(형은, 채이, 명옥)

그리고 또 하나 오글거리는 단어인 연대. 연대는... 편을 가르고 모여서 힘을 합치는 것이 아니라 부족하지만 서로 기대어 힘을 내보는 것일 텐데 젊은 세대 형은과 채이에게 기존 세대인 명옥과 명옥의 후배가 너무 멋진 모습으로 모델이 되어주었다. 자세한 스토리가 나온 것은 아니지만 말 그대로 좋은 선배가 되어 이끌어주셨으니 이제 자신이 갚으려고 한다는 이 말이 나는 왜 그렇게 감동적이던지.


이건 여성들의 연대라고 한정 지을 것이 아니라 인간의 도리보다는 이해득실을 기준으로 하는 삶을 탈피한 서로 기대어 돕고 사는 응당 갖춰야 할 인간의 바른 모습일 것이다. 어쩌면 사실 페미니즘과 연대라는 단어는 우리가 서로 배려하고 존중하는 삶을 살았다면 생겨나지 않았을 단어이자 그렇게 살지 못했음을 방증하는 단어일지 모른다.



p147. 형은의 다름이 채이를 화나게 하고 미움을 솟구치게 했다. 체온이, 함께한 시간이, 열이 내렸는지 보려고 서로의 이마를 짚어보던 밤의 기억이 있어서 그들은 가까스로 영원히 헤어지는 일은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 역시 태어나면서부터 그런 것들을 공유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어렵고 어색하더라도 서로를 마주 보고, 이름을 말하고, 자기소개를 하고, 함께 시간을 보내지 않으면 어떻게 그런 것들을 나눠갖기 시작할 수 있을까, 채이는 생각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은 불안해하며 서로 다른 목소리에 어긋나기도 했다. 아직 누가 누구인지, 어떤 얼굴을 했는지, 어떤 삶을 살아왔고 그 목소리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이해하지 못해서 그렇다. 여자들 지들끼리 싸우는 게 아니라 목소리를 내는 것이 익숙지 않아 그렇다. 형은과 채이처럼 때로는 다름이 화를 부르기도 하지만 함께 지내온 시간이 있다면 서로를 보듬고 토닥일 수 있다. 이 책은 우리도 그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준다. 목소리를 내는 사람, 내지 않는 사람 모두 열심히 삶을 살아내고 있으니 작가는 페미니즘이라는 특별한 이슈를 다루는 듯하면서 모두를 품는 이야기를 한 것이 아닐까?



p194. 어쩌면 연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같아지는 것이 아니라 상처 받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일지도 모른다.

다른 생각을 하고 다른 감정을 갖는 것은 아무 잘못이 없다. 다만 내게 '자기 결정권'이라곤 하나도 없는 것 같이 여겨졌던 시기가 누군가에게는 지금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며 목소리를 내어 도울 수 있었으면 좋겠고 현재 행복을 누리는 사람은 그 행복을 전하면 좋겠다. 나는 행복한데 쟤는 왜 저래? 나는 힘든데 너는 행복해? 서로 눈을 흘기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같은 생각, 같은 감정을 느끼며 똑같이 행진해야 맞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자리에서 앞, 뒤 사람을 돌아봐줄 수 있는 여유를 가졌으면 좋겠다. 그렇게 오래도록 긴 레이스를 즐겁게 함께 가고 싶다. 결국 페미니즘이란, 연대란, 그런 마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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