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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아한밍블 Aug 19. 2020

행복이라는 기분으로의 산책

'시와 산책'을 읽고

행복해?


생각해보면 행복이라는 단어는 여기저기 자주 끌어와 쓰는 반면 행복해?라고 묻는 질문의 빈도수는 떨어지는 것 같다. 지금 위의 문장을 쓰면서도 헤어진 연인이 눈물을 삼키고 서로의 행복을 비는 듯 아닌 듯 애매한 목소리로 묻는 장면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을 보면 행복하냐는 질문은 참 실생활에서 묻기엔 뭣한... 그런 질문인 것 같다. 행복하다고 대답하는 사람을 보며 별로 안 행복한 사람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 것이며, 서로 행복해 죽겠는 사람끼리는 대답이 필요치 않은 질문일 테니 타인에게 행복하냐고 묻는 일은 실상 얼마 없지 않을까?


그렇다면 저 질문은 어디에 쓰는 것일까?

나의 경우를 떠올려보니 내게 묻는 질문일 때가 많은 것 같다. 무언가를 선택할 때, 방향을 정할 때, 또는 내 삶을 기록하며 정리할 때 내게 묻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행복하겠냐고, 너의 시간은 행복했냐고.


'행복하기 싫다'는 내 말은 정확히는 '행복을 목표로 살고 싶지 않다'는 뜻이다. 많은 이들이 행복을 '승진' '결혼' '내 집 마련'등과 동의어로 여기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다. 행복은 그렇게 빤하고 획일적이지 않다. 눈에 보이지 않고 설명하기도 어려우며 저마다 손금처럼 달라야 한다. 행복을 말하는 것은 서로에게 손바닥을 보여주는 일처럼 은밀해야 한다. 내 손을 오래 바라본다. 나는 언제 행복했던가. 불안도 외로움도 없이, 성취도 자부심도 없이, 기쁨으로만 기뻤던 때가 있었던가. [시와 산책 p30 / 한정원]


맞다. 행복은 전혀 획일적이지 않다. 타인에게 너는 언제 행복하니?라고 기습적으로 질문하면 깊이 대화를 나누지 못한 사람의 대답은 거의 비슷하겠지만(가족과 함께 있을 때, 맛있는 거 먹을 때 등) 꼬치꼬치 세분화시키면 아주 구체적이고 사소한 대답이 나올 수 있다. 나의 소확행은 너무나 분명한 이미지로 존재한다. 여름이 오기 전(봄이라고 하기엔 변덕스럽지 않은 안정된 초록 날씨)의 아침시간 반짝이는 초록잎을 바라보며 그저 내게 이런 여유가 있음을 감사하며 벤치에 앉아 있는 시간이라든지, 아무 날도 아닌데 휴가를 내고 출근시간에 지하철 역 카페에서 출근하지 않고 있다며 혼자만 아는 자랑을 하는 것이라든지, 내 입맛에 딱 맞는 특정 카페의 과일샌드위치를 호들갑 떨며 먹는 시간이라든지 말이다.


영덕 메타세쿼이아 길에서 나 (2018 여름)

언급한 행복들은 매우 사소해서 언제든지 실행할 수 있음에도 내가 원하는 아무 때나 가능하다면 또 그게 행복으로 느껴지진 않는다는 특징이 있다. 나의 행복은 설명하기도 쉽고 은밀하지도 않지만  떠올리면 스르르 미소 짓게 된다. 나는 그때 행복했지.. 나는 그런 걸 좋아하지... 조만간 그 행복을 실행해야지... 하면서. 어느 누구도 간섭할 수 없는 행복이자 누구에 의해서가 아닌 오직 나 스스로 실현할 수 있는 행복이라 더욱 마음에 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반면, 타인과 함께 할 때 행복한 경우도 있다. 사람마다 행복의 비율을 구성하는 요소는 다르겠지만 아무래도 부대끼며 살아가는 인간의 속성상 누군가로 인해 행복한 경우가 많지 않을까 싶다.

할머니가 온전치 못한 이목구비로 환한 미소를 지으며 노래할 때, 손가락이 없어 뭉툭한 그녀의 손을 내가 쓰다듬으며 그 노래를 들을 때, 우리 사이에 무엇이 있었다. 그것을 행복이라고 부르고 싶었다. 행복은 그녀나 나에게 있지 않고 그녀와 나 사이에, 얽힌 우리의 손 위에 가만히 내려와 있었다. [시와 산책-행복을 믿으세요?/한정원]

저자의 말이 너무나 와 닿는다. 행복은 그녀나 나에게 있지 않고 그녀와 나 사이에, 얽힌 우리의 손 위에 가만히 내려와 있다고. 지난달부터 대학 후배들과 정기적 모임을 갖고 있다. 일 년에 한두 번 겨우 보긴 했는데 늘 갑작스레 만나 번개같이 헤어지니 굵직한 이슈를 빠르게 훑을 뿐이고 정작 사소하고 소소한 일상적인 이야기는 나눌 수 없음이 늘 아쉬웠다. 다들 바쁘고 만나지 않아도 생각하고 있으니 우리라도 서로 부담 주지 말자는 배려 차원에서 모임을 우선순위에 두지 않다가, 우리 이제 우리 모임을 우선순위에 두고 만나기를 노력해보자고 내가 목소리를 내었다. 모두 어린아이를 키우는 엄마들이라 짧은 오전 시간에 만날 수밖에 없지만 그래서 더 속사포로 알차게 이야기를 나눴다. 어색하지만 헤어지기 전 단체사진도 찍었고 나 혼자 순간순간을 몰래 찍은 사진까지 단톡 방에 공유했다.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이었지만, 우리의 이야기는 어쩌면 흩어져 사라지기 딱 좋은 그저 그런 아줌마들의 이야기였지만 틀에 박힌 단체사진에 다른 듯 같은 한 명 한 명의 행복이 모두 자석처럼 끌려오는 기분 좋은 에너지를 느꼈다. 기억하고 싶은 순간, 그리고 계속하고 싶은 만남, 이어지는 행복.


그런 행복이 있다. 무엇을 해줘서가 아니라, 어떤 특별한 무엇이 있어서가 아니라 함께 한 시간을 오래도록 떠올리고 싶은 선물 같은 행복 말이다. 머리가 지끈거리는 날, 삶의 방향을 잃어버린 것 같은 날 꺼내보고 싶은 사진, 마음을 함께 나눌 수 있는 관계 그 자체가 행복인...


은밀한 혼자만의 행복,

소소하고 확실한 행복,

일상적이지만 특별한 행복,

아무것도 해주지 않았음에도 거저 얻어지는 행복,

존재 자체로 느껴지는 행복,


행복의 원천은 다양하다.

꼭 누군가를 사랑해야,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아야 행복한 것이 아니고 물질적인 풍요로만 채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어쩌면 다양한 곳에서 그야말로 줍줍 할 수 있는 게 행복일지 모른다. 내가 주우려고 둘러보기만 한다면...


좋은 글을 만나 행복에 대해 생각하니 기분이 좋다.

더운 여름밤, 코로나 19로 지친 이 밤, 행복을 생각할 수 있어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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