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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아한밍블 Jan 20. 2021

평범한 한 남자의 이야기, 스토너


출간된 지 50년이 지나서야 미국을 넘어 전 세계를 사로잡은 소설이라고 띠지에 쓰여 있는 스토너라는 소설은 스토너라는 남자의 인생 이야기입니다. 특별할 것이라고는 없는 한 남자의 이야기에 왜 전 세계는 관심을 보였을까요? 아마 삶의 고단함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평범하게 사는 것도 쉽지 않은 요즘이잖아요. 아마 10년 전쯤부터 우리의 삶은 양극화되기 시작했고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조금씩 지쳐가는 사람들이 생겨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생각대로 끝까지 인생을 살아낸 스토너에게 경이감을 느끼는 동시에 어쩌면 실패라고 부를 수 있는 그의 사회생활에 깊이 공감하고 위로받는지 모르겠습니다.

스토너는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농가의 생활에 익숙했고 그곳을 벗어나겠다는 의지 또한 없었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군청 직원이 전문화된 농업기술을 배우면 농가에 도움이 된다며 대학 입학을 권유하죠. 그렇게 들어간 대학.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학문의 만남, 특별히 영문학과의 조우는 스토너를 이전과는 전혀 다른 곳으로 향하게 합니다.

평범한 남자의 인생이라고 서술하기엔 제게 스토너는 꽤 진취적이라 여겨졌습니다. 농업을 배우러 간 곳에서 영문학을 택한 것도 아내와의 만남에서도 주저하는 모습은 없었습니다. 소심하고 쩔쩔매는 모습을 예상했는데 꽤 박력 있고 적극적인 연애 태도를 보여서 앗, 이 남자 의외인데? 했답니다. 지금 와서 잔잔하게 소설로 읽으니 평범한 남자의 삶이라고 생각되지 사실 스토너의 삶을 곁에서 직접 보고 있었다면 평범하다는 말을 할 수 없었을 것 같습니다.


p52. 매스터스가 빙긋 웃었다. “고든은 자신에게 허락된 미덕의 힘을 처음으로 느끼고 있는 거야. 그러니 당연히 온 세상 사람들을 거기 끌어들이고 싶어 하지. 그래야 자신의 믿음을 계속 유지할 수 있으니까. 그래, 안 될 것 뭐 있나? 우리랑 같이 입대하세. 세상이 어떤지 보아두는 것이 자네에게도 좋은 일이 될지 모르잖아.”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강렬한 시선으로 스토너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군대에 가더라도, 제발 부탁이니 하느님이나 조국이나 친애하는 미주리 대학을 위해 가지는 말게. 자네 자신을 위해서 가는 거야.”


스토너 소설의 배경은 1910년에서 50년 사이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전쟁과 기존 이념의 보수적인 관념에서 자유롭지 못하던 때, 하지만 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한 시기에 많은 청년들은 자신의 마음을 지키기 어려웠죠. 위대한 개츠비도 그랬고요. 스토너의 친구들은 대학에서 학문의 열정을 펼쳐야 할 시기에 세계대전에 참전해야 했고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며 자랑스러워하는 국가관을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매스터스는 열정을 국가에 쏟으면서도 스토너에게 제대로 조언합니다. 군대에 가더라도 하느님이나 조국이나 대학을 위해 가지 말고 자신을 위해서 가는 거라고. 이 말은 지금 시대에도 유효합니다. 어느 방향으로의 움직임이 가득할 때 그것을 따르지 않는 것이 바보 같아 보일지라도 자신의 신념에 따라 움직여야 하는 것 말입니다.

스토너는 대학에 남습니다.

그의 마음이 자세히 설명되어 있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자신을 위한 결정임은 틀림없어 보였습니다. 저는 친구들이 다 간다면 얼렁뚱땅 휩쓸려서 갔을 것 같거든요.^^;;

제가 이 소설에서 이해하기 어려웠던 부분은 이디스와의 관계입니다. 다른 것들은 모두 스토너의 생각과 신념대로 행동한 것 같고 이디스를 택한 것도 스토너 자신인데 그들의 결혼생활은 왜 그렇게 엉망이었을까요?


p167. 그는 이디스의 새로운 행동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활동은 그에게 아주 조금 성가실 뿐이었고, 그녀가 행복해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가 조금 필사적인 것 같다는 느낌이 들기는 했다. 사실 그녀가 이렇게 새로운 삶의 방향을 찾게 된 책임은 그에게 있었다. 그녀가 그와 함께하는 결혼생활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게 해주지 못했으니까. 따라서 그녀가 그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곳에서 인생의 의미를 찾아 그가 따라갈 수 없는 길을 가는 것은 옳은 일이었다.


자신의 선택을 지지받기 위해서는 책임을 져야 합니다. 제가 볼 때 스토너는 '책임'에 대한 부분을 잘못 이해한 게 아닐까 싶어요. 이디스가 필사적으로 이상한 삶을 살기 시작한 것을 그저 눈감아 주고 견뎌주는 것으로 자신의 '책임'을 다했다고 생각하는 걸까요? 그토록 사랑하는 딸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구해주려는 행동보다는 눈으로 이야기하는 방식만을 택합니다. 이디스가 정말 이상한 여자라는 생각을 하다가도 억눌린 가정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작을 하는 곳에서도 감내해야 할 것 투성이라면 적잖이 스트레스였겠다 하는 생각도 잠시 했습니다. 어쨌든 저는 한 가정을 구성하고 사회의 작은 조직원으로서 스토너에게 소극적인 책임 의식이 아쉬웠습니다.


p309. 하지만 윌리엄 스토너는 젊은 동료들이 잘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세상을 알고 있었다. 그의 마음속 깊은 곳, 기억 밑에 고생과 굶주림과 인내와 고통에 대한 지식이 있었다.(...) 선조들은 자신을 억압하는 세상을 향해 무표정하고 단단하고 황량한 얼굴을 보여주자는 공통의 기준을 갖고 있었다. 비록 스토너는 그들을 무감각하게 바라보는 것처럼 보였지만, 자신이 살아온 세월을 의식하고 있었다.

 p311. 아처 슬론과 마찬가지로 그도 세상을 미지의 종말로 몰고 가는 비합리적이고 어두운 힘에 자신을 온전히 바치는 것이 무익한 낭비임을 깨달았다. 하지만 아처 슬론과 달리 스토너는 연민과 사랑의 감정을 향해 조금 뒤로 물러났기 때문에 눈앞의 급박한 흐름에 휩쓸리지 않았다. 과거 위기와 절망의 순간에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도 그는 대학이라는 기관에 구현되어 있는 신중한 믿음에 다시 의지했다. 속으로는 그 믿음이라는 것이 별것 아니라고 되뇌었지만, 이제 자신이 손에 쥔 것이 그것뿐임을 그는 알고 있었다.


고지식하고 자신의 신념으로만 세상 혼자 사는 것 같은 스토너에게도 미묘한 변화가 생겼습니다. 그가 어린 시절 배운 단단한 세월의 결이 온전치 못한 사랑과 세상의 시선으로 흔들렸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강의방식을 바꿈으로 용납하기 어려운 시간표 배정에 항의합니다. 그러고 보면 스토너에게는 영문학, 강의가 가장 큰 열정이었던 것 같아요. 정치적인 사회생활에 아랑곳하지 않던 그가 강의에 있어서만은 다양한 시도를 했고 학장과 학과장에게 발언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으니까요.


스토너는 영문학을 사랑했고 강의에 희열을 느꼈지만 미주리 대학에서 조교수로 생을 마감합니다. 이렇다 할 업적을 남기지 않았죠. 다만 그래서 그의 인생을 실패했다고 봐야 하나?라는 물음에는 당연히 NO입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공부를 했고 자신이 원하는 만큼 학교에 남아 있을 수 있었다면 성공한 인생이죠. 그러나 그의 가족을 생각하면... 적어도 가정을 이루고 자녀를 키우기로 결정했다면 자신의 인생에 신념을 지키는 것과 같은 무게로 가정을 생각해 서로 이야기를 더 많이 나누었다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사실 가장 어려운 문제입니다.

서로가 완벽한 한 개인으로 인정하며 존중하는 것이 방임하라는 이야기는 아닌데 한편으로 어느 정도의 개입과 갈등을 겪어야 하는가 하는 것이요.


급변하는 세상에서 나의 신념을 가지고 그저 버티는 것도 버거운데 누군가를 부양하고 양육까지 하는 것이 쉽지는 않죠. 그래서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하는 가 봅니다. 이런 책을 통해서 예전에도 그랬구나, 지금도 그런데... 삶은 역시 어려운 것이구나 위로를 얻기도 하고 소비를 통해 한 순간 통쾌하게 잊어보기도 하고. 뭐 그런 거요. ^^


결국은 우리 모두 토탁토닥해줍시다.

그리고 개의치 말고 계속 나아갑시다. ♡


+ 이 소설의 번역이 김승욱 님이신데 정말 유려하게 아름답습니다. 이렇게 매끄러운 번역 정말 황홀했습니다. 잘 모르지만 어쨌든 문장이 참 아름답다고 느꼈거든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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