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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정한 밍블 Feb 06. 2021

겉바속촉의 마음을 얻는 법

내가 머무르게 될 공간에서 하는 나만의 의식이 있다. 새로 발령받은 사무실, 집의 안 방, 잠깐 머무르게 될 호텔 객실이라고 해도 책 몇 권을 놓아두고 ‘여기는 내 공간이다,’ 하는 주문을 거는 거다. 낯선 공간이 두려워서,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서 나를 편안하게 해주는 소품을 놓아두기도 한다. 실물보다 예쁘게 나온 내 사진이나 꽃무늬가 그려진 컵 같은 것들.      


‘자기만의 공간’은 물리적 공간을 의미하는 동시에 심리적 공간까지 포함한다. 물리적 공간을 확보하기 힘든 사람이 소품에 의지해 심리적 공간을 마련할 수도 있겠지만 심리적 공간이 있다 해서 자신만의 물리적 공간이 필요 없는 건 아닐 테니까 말이다.      


휴직 중인 내가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안방은 꽤 큰 편이다. 기본적인 가구를 포함하고도 꽤 큰 책장이 있어 서재 느낌이 동시에 나는데 너무 딱딱한 느낌은 싫어 낮은 수납장에 작은 책꽂이와 화병까지 더했다. 라탄 소파와 러그는 빠질 수 없는 아늑템이지.     



가끔 SNS에서 나와 비슷한 또래의 여성들이 거실 식탁을 서재삼아, 또는 거실 한 편을 자기만의 공간으로 여기며 새벽 시간을 갖는다는 피드를 보곤 하는데 현재 우리 안방은 내 기준에서는 꽤 호사스러운 서재임이 틀림없고, 시간도 넉넉한 나는 여러 면에서 누군가에겐 부러움의 대상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온전히 내 취향대로 꾸몄고 지금도 수시로 방의 구조를 바꾸고 내 취향의 소품을 살 수 있는 데다가 낮이나 늦은 밤이나 나 혼자 쓰고 있으니까. 안타깝게도 신랑은 아무런 선택권이 없다.   

   

그럼에도 요즘 나는 줄곧 뚱해 있다. 얼굴에 불만족을 덕지덕지 바르고 있으면서도 속 좁은 사람처럼 보이기는 싫어 아닌 척하고 있지만 누가 봐도 검은 기운을 온몸으로 드러내고 있달까. 생각해보면 이유는 간단했다. 내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없다는 것. 물리적 공간을 크게 확보하고도 내 마음의 공간은 상당히 비좁은 상태라는 것.

    


 나이 마흔에 내 마음대로 살 수 없다는 것쯤은 모를 리가 없는데 부쩍 불만인 이유는 코로나 19로 인한 관계의 단절과 복직 후 두 아이의 안정적 보육을 위해 선택한 친정과 합가... 때문이라고 조심스럽게 말해본다. 큰 평수의 집, 그중에서도 가장 넓은 공간을 차지하고 여유롭게 노트북에 글을 쓰고 침대에 누워 책을 보는 신선놀음을 하고 있으니 이런 불편한 마음을 드러내면 안 될 것 같은 부담이 아이러니하게 또 다른 무거움이다.


 코로나 19로 부모님, 나, 아이들까지 모두 한 공간에서 지내는 것은 생각보다 자연스러웠지만 자잘하게 어려웠다. 나는 내 나름의 방법으로 집안일을 하고 엄마는 엄마의 방식으로 일을 하시는데 그 시간과 방법이 서로 다르니 많은 부분 부딪히게 됐다. 여가 시간도 그렇다. 함께 하고 싶은 엄마와 혼자의 시간을 갖고 싶은 나. 나는 혼자서도 책 보고 글 쓰고 할 게 많은데 굳게 닫힌 문을 바라보며 엄마는 서운함을 느끼고 문 안쪽에서 나는 부담을 느낀다.


         

내가 먹고 싶은 시간에 밥을 할 수 없고, 먹고 싶지 않아도 건너뛸 수 없었다. 늘어지고 싶을 때 마냥 늘어져 있을 수도 없는 건 엄마의 사나운 잔소리 때문만은 아니다. 함께 살면서 서로를 배려한다고 했던 일들이 언젠가부터 조금씩 쌓여 피로감을 느낄 만큼 커졌고, 코로나 19라는 지독한 바이러스까지 더해져 내 정신은 피폐해져가고 있었다. 복직 시기가 다가와 긴장하는 것과는 별개로 그래도 갈 곳이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을 할 만큼 지금 이 공간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크다. 무엇보다 먹고 자고 청소하는 일에만 신경을 집중해야 하는 이 작은 공동체 안에서 쳇바퀴 돌 듯 살고 있다는 게 갑갑했다. 아침엔 뭘 먹나, 점심은 누가 차리나, 애들은 또 어지르는데 누가 치우나 같은 생각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나는 이런 마음으로 내 공간을 채우고 싶지 않은데 모두 허드렛일로 여겨져 짜증이 났다.     


누군가 내게 날카롭게 질문을 던지는 소리가 들린다.

“그렇게 힘들면 다시 분가하면 되잖아?”

“그렇게 답답하면 나가서 누구라도 좀 만나면 되잖아?”          


 손님들도 가끔 의아해하며 묻는다. 이렇게 구석진 동네에서 책 팔아 월세를 감당할 수 있느냐고. 당연히 그 수입으로는 월세를 못 낸다. 나는 이 공간을 지키기 위해 다른 일들을  하고 있다. 프리랜서로 카피라이팅 일을 하고 오프라인 강연, 온라인 강의도 계속하고 있다. (...) 내가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좋아하는 걸 지켜내기 위해서는 감내해야 하는 것들이 생기기 마련이라는 걸 말하고 싶어서다. 겉보기에 저 사람은 저런 공간이 있어 얼마나 행복할까? 하고 생각할 테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라는 걸 얘기하고 싶어서다. [자기만의 (책) 방 p186, 이유미/드렁큰 에디터]     


‘좋아하는 걸 지켜내기 위해서는 감내해야 하는 것들이 생기기 마련'이라고 말하는 이유미 작가의 책방 이야기를 읽으면서 생각해본다. 책방에 앉아 우아하게 책장을 넘기거나 키보드를 두드리는 모습만 보고 단순히 부럽다고 말할 수 없다는 걸 알게 되면서 내 상황을 다시 생각해봤다. 나는 아이들을 안정적으로 보육할 수 있는 환경을 선택했다. 원할 때 밥을 먹지 못하고 고 싶을 때 쉬지 못한다는 불편쯤은 요즘 워킹맘들이 느낄 불안감과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지금 내게 필요한 건 물리적인 공간이 아닌 겉바속촉의 마음이 아닌가 싶다. 흔들림 없이 내 삶을 계획하고, 주어진 상황에 맞춰 조금의 여유를 누리는 유연한 마음 말이다. 도대체 그런 마음은 어떻게 해야 얻을 수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예전엔 엄마들이 “나 배 안 고파”라며 밥을 건너뛸 때 정말 배가 고프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엄마가 되고 나서야 알았다. 배가 안 고파서가 아니라, 자식들에게 맛있는 걸 양보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냥 밥이 차리기 싫어서 라는 걸. 오늘 내가 그랬다. 삼시 세끼 밥 차리는 게 지겨워 건너뛰었더니 갑자기 미치도록 배가 고파졌다. 냉동실에 얼려 둔 베이글을 꺼내 먹어야겠다.

     

아! ‘겉바속촉’의 마음을 얻는 방법은 글쓰기가 아닐까? 이렇게 속마음을 털어놓듯 글을 쓰면서 배배 꼬인 마음이 서서히 풀어짐을 느끼니말이다. 얼굴에 덕지덕지 붙어있던 불평의 감각도 배고픔으로 전이되면서 한결 편안해진 것 같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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